이분, 저분, 그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글제는 사람의 높임 말이다. 됨됨이랄까? 품격을 담고 있을테다. 이놈, 저놈, 그놈이나 이년, 저년, 그년이 한 세상 다해 온 여정에 발자국이 나름 깊이를 가졌음을 함의한다. 귀열어 수 없이 들었던 게다. 나름 존경받을 분들로 '이분'은 "일찌기 뜻한 바 있어…". '저분'은 "우리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한…". 현재 시.공간을 넘어서 지칭할 '그분'은 어떠려나? "지나온 발자국마다 눈물 고인 타관 땅 밟아서 돈지 그 몇해던가". 물 설고 낯 설은 타관살이에 고향에 돌아갈 날을 손 꼽아 헤아린 <나그네 설움>이다. 가슴 시린 "거두망산월 저두사고향" 그 세월에 머릿결도 희끗희끗 할테다. 정다웠던 "이쁜이 곱분이"도 고향을 떠났을 지니, 맘 허리 잘린 세월은 '분'이 되려 했는가? 두어 발 건너 뛰니 한 분야에 남긴 글발도 의미롭다. 케냐 한 여인에서 근원한 인류사에 '이분' '저분' '그분'이 한 둘이랴! 바로 어릴적 읽은 위인들이 그런 '분'들이겠다. 석가, 공자, 예수를 비롯해 문학가, 과학자, 음악가, …등 무수한 '분'들이 문명사에 등불을 켰다. 귀에 익은 굵직한 글발 선보인 사마천, 찰스 다윈,...
이년, 저년, 그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글제는 이놈, 저놈, 그놈의 짝말이다. 년놈이 어울려야 세상이 돌아간단다. 또한 품새도 '이분', '저분', '그분'에 이르려니 추임새 말이겠다. 어릴적 내 누이 얘기요 마당 건너 이웃 누이들도 한번쯤 들었을 게다. 심심치 않던 어미의 메조소푸라노와 아비의 바리톤 발성이 울을 훌쩍 넘어 뻗친다. '이년'아, "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저년'이 "귓구멍이 막혔나?" 허면 아예 몸을 숨긴 '그년'은 어떠려나? 학교에서 돌아와 책 보따리 휙 던져 놓고 밖에 싸돌아다니던 날, 고무줄도 하늘에 닿았더라. "해넘어 간다 밥해라", 아비 어미 온종일 쉴 틈 없이 허리 구부린 들녘에서 돌아와, 철딱서니 없는 딸년 나무라시던 귀에 익은 소리다. '이년', '저년', '그년'이 어엿 여섯마디 넘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재롱둥이 손주 손녀에게 '하비' '하미' 소리를 들을테다. 장모 손맛은 장독대 숙성된 장맛이라 사위녀석 그맛에 홀딱해 꽤나 예쁜 딸년 데려가며 처갓집 말뚝에 큰 절은 했으려나? 뒷짐 진 서방에 케케묵은 '거안제미' 옛시절이 웬말인가? SRT에 올라 앉은 시대흐름이다. 주방에서도 양성평등이 실현되니 진즉 한마장
이놈, 저놈, 그놈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나름 울을 헐어 세간에 흩뿌려진 통통한 말들을 엮는다. 대감댁 고운 아기씨 아닐지나 널 뛰어 흘깃한 담장 너머 구경이다. 흐른 세월에 깊숙이 쟁여 둔 말들 가운데 '이놈' '게 섰거라', '저놈' '잡아라'는 귀에 익은 자연스러운 어울림 말이다. 허면 화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놈'은 어떠려나? 앞에 말은 어릴적 참외서리 밭두렁 이나 과수원 울타리 주위에 울리는 어르신들 외침이다. 어릴적 한번쯤 들었을만한 정감있는 말, 다시 못을 그 옛날의 통통 튀던 개구쟁이 시절에, 회초리 맞을 멋스런 놈들이다. 이놈, 저놈, 그놈이 성장해 이분, 저분, 그분으로 자리하니 어언 세월이 훌쩍 여섯마디를 넘어섰다. 가장이 되었으니 누구나 나름 쌓은 공덕이 구릉 높이와 넓이는 족히 되리라. 자식도 두었으니 내 발길이 자식들에겐 가르침이요 이웃에게 베품은 본이겠다. 오호, 눈을 감으랴! 귀를 닫으랴! 어찌된 일인가? 저잣거리가 소란하다. 이분, 저분, 그분이 되어야 하건만 뭘 하셨길래 이놈, 저놈, 그놈 보다 못한 이××, 저××, 그××, 심지어 강아지가 되어 제철도 아닌 가을 낙엽처럼 거리에 나뒹구니 말이다. 더구나 제자 백사의 심오
경기마라톤대회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오전 6시 기상, 예년처럼 글제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송원중학교에 주차한 후 수원종합운동장에 들어서니 여느 해보다 많은 선수들이 참가한 듯 활기가 넘쳐난다. 출발전 가슴에 손 얹어 태극기에 예의, 대회사, 축사, 축포와 함께 가벼운 몸차림에 어울린 가벼운 생각들이 풀코스, 하프코스,10km, 5km 순으로 출발이다. 가슴뛰는 풀코스에 이어 마라톤삼총사로서 한결 같은 두 친구들이 참가한 하프코스 선수들이 출발하자 10km에는 이팔청춘 팔랑팔랑한 꽃들도. 세상을 한손에 쥘 청춘들도 무리지어 달려 간다. 끝순인 5km코스 맨 후미를 물고 천천히 걷는다. 아장아장 걸음마 아가 손을 잡은 젊은 엄마와 유모차를 밀고 가는 아빠, 곁에 이웃의 젊은 부부려니 나란히 걷는 모습이 정답다. 기분좋은 '찰칵'한 모습이 훗날에 웃음 지을 엔돌핀 저장고이려. 참가 선수들의 텐트가 둘러친 운동장을 한바퀴 걷는 동안 5km 선두가 들어 온다는 멘트다. 이어서 날아갔다 왔는지 10km 선두도 휘이익 달려 들어오고, 그 뒤엔 5km 어린 학생도 쌩하니 달려드니 골인 지점에 늘어선 관중의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바르셀로나 마라톤 영웅 황영조, 국민
너와 나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저녁나절 모임 후 귀가해 몸을 누이자, 깊어가는 봄밤의 다정이련가. 청춘을 회상하니 오가시던 님(너)의 고운 목소리 유리창에 주루룩이다.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홀로 잠못 이루나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래, 너와 나를 이어보자. [파란 바닷가에 떨리는 손 잡아주던 '너' 별빛 같은 눈망울로 영원을 약속하며 '나'를 위해 기도하던 '너' 웃음지며 눈감은 '너'] 아니던가? 목청 돋우며 이장희가 부르던 <그건 너>와 창백한 청춘들의 넋을 어루던 이종용이 부른 <너>다. 정녕, 그놈의 '너'가 문제란 말인가? 짝말은 '나'요, '나'의 짝말 또한 '너'일지니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너와 나'가 함께 사는 세상이니... 주인장, "빨간 거로 하나 더요", 소란스런 자리를 가르는 소리에다 옆자리서 들려오는 또렷한 말이다. "국민을 걱정해야 할 정치인(여의도)들이 오히려 괴롭히다니 망가진 세상이여". "그게 어제 오늘 일이여?"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시는 어르신들이 주고 받는 서러운 대화에 백탄 위 불판에 놓인 삼겹살 마저 까맣게 타드나보다. 쐬주잔을 대신해 <
제10회 행복한 가게 마라톤대회 아침 6시 복장을 채비해 집을 나섰다. 고관절로 몸이 편하지 않은 상태이나 몸에 울림을 위해 오랜만에 한강 둔치에 나들이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8시, 벌써 참가자들이 많이 모여있다. 이게 웬일인가? 참가자들이 20~30대 젊은 청년들이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청춘’이 아니던가! 생동하는 그들이 싱그러운 아침을 연다. 오늘은 부활절, 곳곳에 축제 마당이 펼쳐질 터이다. 글제도 여의도 한강 이벤트 광장에서 열린 마라톤대회다. 행복한 가게가 주최하고 대한생활체육연맹이 주관하는 소외계층돕기 마라톤대회다. 30명 이상 신청하는 단체에게 장학금을 받을 소외계층(디딤씨앗 대상 아동) 1명을 추천받아, 추천한 단체와 행복한 가게가 후원하며, 대회 참가비는 기부금으로 전액 단체에서 추천한 대상 아동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하는 대회란다. 출발 전, 무대 위아래 댄서들의 율동에 절로 참가자들의 몸사위도 발랄하다. 찰랑대는 댄서들을 따라 둔중한 삼총사들도 굼실대며 탁 트인 강변에서 개구리처럼 폴짝거려 기분 좋은 날이다. 이마를 이은 텐트들이 강변까지 늘어서 주최자의 알림도 예년과 달리 많은 선수란다. 코로나로 한동안 닫은 몸을 풀기 위함도 있거니와
大字(큰 대) 시인/ 영화감독 우호태 봄날이니 우스개 소리 좀 해야겠다. '대'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뭘까? 옷이나 건물 크기? 아니면 주문 음식메뉴나 술병? 대인(大人), '대'자를 입고 먹거나 마셔야 할까보다. 부지불식간에 숫자나 말에 중독되어 본연의 의미가 퇴색한 사례 허다하다. 조심스레 큰 '대'자의 지닌 뜻을 살핀다. 한때나마 '대'자로 인해 개인은 골병(?)이 들거나 절로 위상이 따랐나도 싶다. 우선, 대학에 '대'자다. 이즘에야 너나 할 것 없이 대학을 갈 수 있어 대수롭지 않으나 십여년전(?)만 해도 '그놈의'가 붙어 가르치느라 '뼈골' 빠진다 하여 우골탑이란 별호도 얻었다. 고상하게 표현해 큰 배움터니 진리탐구의 장소였다. 강단 떠난지 10여년에 청춘만 늙은 게 아니라 강산의 변화가 눈부시다. 배워서 남에게 준 사람이 많아 굶주린 가난을 벗고 반세기만에 경제대국 다운 면모를 이뤘다. 허니 배움도 국력이겠다. 또 다른 '대'자는 대기업의 '대'자 이겠다. 대다수 젊은이들이 선망한다면 지나칠까? 규모로 중소기업, 대기업으로 허실에 따라 강소기업, 중견기업으로 분류하나 필자는 가족기업을 강조하련다. 대를 물리는 음식점이나 장인정신 깃든 가업
동기부여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사물에 감응해 내맘에 이는 알고 싶어하는 기를 호기심이라 부른다. 지적 생명체의 본능이라 주변 것에 관심을 보태고 나서는 필자는 호기심이 많다. 그 호기심이 부풀면 꿈이요 실천하면 창조행위다 허니 호기심 일게 하는 스승의 동기부여는 제자에겐 크나큰 삶의 추동력이다. 하여 '청출어람청어람'의 의미는 세상 진화와 발전에 아주 깊은 물길이다. 짧은 인생에 호기심 일어 밤낮 새김질한 과제를 공적 공간에서 다중에게 가르치는 스승의 진지한 모습들이 감동이다. 제자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훌륭한 동기부여라 하겠다. 주입된 이념에 찌들어 일그러진 청춘시절을 보내 나이들어 삶의 회한을 토로하는 글을 이따금 보니 지난날 낭비한 내 모습도 언뜻언뜻하다. 지팡이 놓고 나서는 발길에 "분류도해불부회"(奔流到海不復回) 맘가짐을 달아매야겠다. 가슴엔 "오기왕지불간"(悟已往之不諫),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 쪽말에 담긴 뜻도 헤아린다. 새벽 창밖이 아른아른하다. 저만큼에 다가선 목소리 더빙한 상상영상이 멋스레 돌아간다. "자네 시방 뭐하는 겨?" "영화 찍는디요" "어허, 이보시게 세상이 무대고 누구나 배우거늘 무얼 찍는단 말인고? 그래 올해 나이가
봄날은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오늘은 경칩이다. "24절기 중 세번째에 해당하는 경칩(驚蟄)은 삼라만상이 잠에서 깨어나 활동할 것을 알리는 천지(天地)의 신호다". 어찌 개구리만 깨어나랴! 봄의 발자국 소리 성큼성큼 다가섰다. 겨우내 두터운 옷을 벗고, 앙상한 가지에 푸른 빛 돌더니 그새 남부 지방에는 산수유 매화 꽃망울이 활짝 피웠다는 소식이다. 굼뜬 몸으로 메타버스를 탄채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로 시대 경계를 얼쩡거렸다. 고금의 무용담과는 달리 꽤 지루한 설명이다. 나름 쟁여둔 앎, 양약고구"라니 꾹꾹 눌러 담으려 겅중겅중 건너 뛴 동.서문명 이야기 새김질에 머리가 띵하다. 역시 머리 공부는 찬바람 이는 가을이 제격인가도 싶다. 그저 사지가 스멀대는 봄날에는 들판으로 팔랑대는 제몸 놀림이 제멋이려나. 소홀한 건강관리로 '이렇게 좋은 날'에 창밖만 바라보니 대체 이 뭣고? 마음이 청춘이요, 세마치 장단에 몸 흔듦이다. "얼씨구 저 절씨구 너를 안고 내가 내가 돌아간다 황진이 황진이 황진이 내일이면 간다 너를 보러 간다 ~~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피는 봄날이다. [야호~ 산마루에 메아리 날면 나물캐는 누이 얼굴
오체투지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간밤에 그토록 가고 싶던 '차마고도'에 순례자들을 따라 너댓시간이나 '오체투지'한 탓에 티벳 고원의 깊은 기운에 취해 오전에 달디단 잠에 들었다. 창가에 봄볕이 졸고 있는 오후 나절이다. 경기도 이고을 저고을 고을 수령이셨더라. 구순 연세에도 등산을 하시고, 모임체에 정신적 기둥이신 원로(별호 지사)께서 카톡방에 올린 동영상-관중석과 거리로 저돌적인 종횡무진의 투우의 모습과 하단 표제인 "이런 소를 국회로 보내자"-이 한여름 열기에 시원한 한바탕 소낙비에 비견하려. 몇번을 홀딱하니 젊잖은 오체에 푸릇푸릇 차오르는 생명력이 씩씩하다. 한때 서점가에 유명세를 떨친 오도다께 히로타다의 <오체불만족>[훗날 '오체만족'의 오명을 달음]을 읽고난 후에 두 다리, 두 팔, 머리의 건강한 오체에 감사했었다. 봄날이다. 사방에 피어나는 생명체의 본연의 제모습이다. '오체투지' 낯이 설던 어구였다. 다섯마디쯤 날들에 내곁에 가까이 누운 계기는 젊은날에 늘상 꼿꼿한 허리로 머리로 세상을 떠받치느라 온세포가 피로한 탓이려나. 돌아보니 '신체발부수지부모'이라 건강한 오체를 낳아주신 부모님 은혜가 가이 없건만 마른 들판에 그간 나홀로 외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