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흥찐빵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아침 일곱 시… 눈이 먼저 나를 깨우더군. 오늘은 횡성에서 둔내사거리까지, 스물여섯 킬로미터 남짓. 라면 한 그릇으로 속을 달래고 배낭을 둘러맸지. 어제보단 짧은 길이라, 마음도 다소 느슨해졌고. 호새: 발걸음이 가벼웠겠네요? 돈키: 그래… 그때였다. “안흥”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더군. 그 밑에 더 크게 쓰여 있던 네 글자. …“안흥찐빵”. 호새: 그 이름 하나로도 군침이 도네요. 돈키: 소문이 맛을 만드는 법이야. 예전에 말이지, 침 맞으러 횡성에 왔다가 아내랑 함께 사 먹은 적이 있어. 그때 알았지. 찐빵도 ‘브랜드’가 되면 추억이 된다는 걸. 호새: 평창 한우, 여주 쌀, 금산 인삼… 이름만 불러도 고향 냄새가 나네요. 돈키: 그래. 충주 사과, 화성 햇살드리… 이제는 맛이 아니라 품격을 사는 시대지. 화성도 그래. 먹거리도 많고, 기업도 있고, 대학도 있고, 바다도 있고… 문화유산도 있는데, 이제는 흩어진 걸 하나로 엮어낼 때야. 호새: 그런데… ‘찐빵’이란 말, 어릴 땐 놀림이 되기도 했잖아요? 돈키: 그래. “앙꼬 없는 찐빵”이란 말로 헛속을 핀잔 주곤 했지. 그래도 말이다, 그 시절 우리한테 찐빵은… 케
산 아저씨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양평에서 횡성까지 여정이야. 용문면, 단월면, 청운면사무소를 거쳐 횡성까지… 56킬로, 140리 길이지. 호새: 하루 일정이 늦어졌네요? 돈키: 그래. 다시 양평군청에 도착한 게 새벽 다섯 시쯤이었어. 서둘러야 했지. 호새: 그래서 바로 걷기 시작한 거예요? 돈키: 네 구간으로 나눴어. 속도 조절하려고. 등산화 끈을 단단히 다시 묶고, 가슴 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15시간을 걸어야 하는 하루… 다짐 같은 거지. 호새: 경계를 넘어가는 길이었죠? 돈키: 그래.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구간. 호새: 주변 풍경은 어땠어요? 돈키: 산이었지. 온통 산.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 한 굽이 돌면 또 한 굽이, 전부 오르막이었지. 인내심이 없으면 못 버틴다. 호새: 물은요? 돈키: 채워 온 물이 바닥났어. 날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솔직히 난감했어. 호새: 차라도 세우지요… 돈키: 그럴 수가 없었지. 그래서 혹시 도움 될까 싶어 솔잎을 씹었다. 호새: 그때 물소리가 났던 거죠? 돈키: 그래. 계곡 아래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내려갔다 올까 말까… 한참 갈등했어. 호새: 그러다? 돈키: 패널 건물이 보였거든. ‘저기엔 물이
사유의 변곡점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새벽 6시인데 벌써 길을 나서요? 어제 막걸리 꽤 드신 것 같은데요? 돈키: 그게 오히려 숙면을 도왔나 봐. 오늘 목적지는 양평군청, 28km 남짓. 노문리 지나 명달계곡, 정배리, 신복리, 덕평리로 이어지는 여정이지. 새벽 산 기운이 차갑더라. 약수로 물병 채우고 한 걸음씩. 호새: 아침 산길 고요가 딱 그려져요. 돈키: 그래, 아스팔트 밟는 소리가 클래식 건반 치는 듯해. 햇살이 막 번질 무렵 명달계곡 입구에 닿았어. 식당 겸 슈퍼 하나 보이길래 아침밥 부탁드렸지. 감자국, 오이상치, 묵은지, 풋고추… 어머니 손맛 그대로야. 고추장에 보리밥 비벼 먹던 그 시절 딱 그 맛. 호새: 산마을에서 만난 어머니 밥상이라… 그거 자체가 여정의 보상 아닌가요? 돈키: 그러게. TV로는 탁구 경기가 한창이라 주인아저씨랑 나랑 눈으로만 ‘대한민국!’ 몇 번을 외쳤는지. 밥값 6천원 드리니 냉수병 다시 채워주시면서 정배리 가는 길도 알려주셨어. "해 뜨기 전 서둘러야 뜨거운 열기 피한다"고. 호새: 천리 길도 한 걸음이라던데, 지금까지 얼마나 걸으셨죠? 돈키: 집 떠난 지 250리쯤 걸었지. 발에 물집 좀 있을 뿐 별 문제 없어.
징검다리 로맨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서종면 오복집까지 20km라면서요? 여유롭겠네. 왼쪽은 강변 풍경, 오른쪽은 초목들… 눈이 호사를 누리네요. 돈키: 서종대교 지나고 경춘고속도로 타면 금방이야. 노문삼거리도 거쳐야 하고. 아, 방금 봤지? ‘소나기 마을’ 표지판. 호새: 황순원의 그 소나기요? 윤초시네 증손녀와 소년… 청초한 사랑 이야기. 돈키: 그래. 동네 어귀 우물가가 저절로 떠오르지 않냐? 단테는 “지구를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라 했는데… 나는 우주를 움직이는 것도 결국 사랑이라 본다. 호새: 그러고 보면 노랫말도 다 사랑 얘기죠. 누구나 한 번쯤 가슴에 품었던 순정… 돈키: 초등학교 동창회만 가도 러브스토리가 피어난다니까. 누가 누구 좋아했다느니, 창문 넘어로 바라보다 마음 졸였다느니… 그런 정서 하나씩 가슴에 있기에 세월 지나도 만나면 즐거운 거야. 호새: 맞아요. 징검다리, 냇둑, 뒷동산… 잃어버린 마음조각들이 불쑥 날아들죠. 돈키: 그래서 ‘소나기 마을’이 순정을 찾는 장소라니까. 가보면 주름살이 펴지는 기분이야. 때 아닌 봄비가 가슴 적시는 듯해. …올 동창 모임엔 호두라도 넣어갈까? 그녀도 나오려나. <자연 풀장> – 계
물테마촌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호새야, 여기 어딘지 알아? 북한강이랑 남한강이 한 몸이 되는 곳, 두물머리야. 한자로는 양수리(兩水里)라고 하지. 호새: 두 물이 만나는 자리… 시작과 끝이 겹치는 느낌이네요. 뭔가 에너지가 퐁퐁 솟는 곳 같아요. 돈키: 맞아. 만남은 늘 큰 에너지를 만든단다. 음과 양이 만나 생명이 태어나고, 남과 북이 만나면 통일이 오고, 지구촌이 만나면 평화가 오는 법이지. 호새: 스승님, 여기 와본 적 있다고 하셨죠? 돈키: 그래. 둘째 형님이 이 근처에서 요양하던 시절에 자주 들렀어. 장마 끝무렵이라 물살이 장쾌했지. 물안개 피어오르고, 두 물이 어깨를 맞대던 그 형상… 아직도 기억에 선해. 호새: 두 강의 출발지도 참 극적이에요. 금강산에서 내달리는 북한강, 그리고 강원 금대봉 검룡소에서 솟구친 남한강이 이 자리에서 딱 만나는 거잖아요. 돈키: 그러니 신비롭고 장엄하지. 수도권의 젖줄이라면서도 아침저녁 풍경은 참 한가롭다. 물소리, 물내음, 물안개, 물빛, 일몰… 한마디로 ‘물테마촌’이 따로 없어. 호새: 자연이 주는 밥상 같네요. 산과 물이 다 주니까요. 돈키: 요즘은 오지(奧地)라서가 아니라 자연자원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제2의 새마을운동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요즘 건강운동이 화두라더니, 형님은 벌써 오래전부터 몸이 생활 자체였죠? 돈키: 우리 중·장년 세대는 따로 운동이 필요 없었지. 초·중학교는 걸어서 다녔고, 고등학교도 집에서 수원 시내까지 8km를 자전거로 통학했어. 대학 다닐 땐 서울까지 한 시간씩 서서 다녔고. 호새: 그 시절엔 자리 양보가 미덕이라며요? 돈키: 그게 일상이었어. 군대가서 더 했어. 아침구보, 산지훈련에 20kg 군장 메고 80km, 200km 행군까지… 그 덕분에 다리가 알아서 단련됐지. 주말엔 조기축구, 등산, 장거리 걷기, 마라톤이 기본이었고. 호새: 듣기만 해도 체력이 국력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요즘도 등산, 골프, 승마, 수영, 걷기, 마라톤, 자전거 여행… 다들 종류별로 즐겨요. 돈키: 국민소득이 3–4만 달러쯤 되면 자전거와 걷기, 마라톤이 취미가 된다는 말이 있어. 초등학교 동창 00도 자전거 여행 가자고 권하곤 하는데, 아직은 따라 나서지 못했지. 호새: 군대동기들도 동호회를 만들어 자전거 타던데요? 밴드에 사진이 자주 올라오던데. 돈키: 전국 어디든 자전거로 갈 수 있는 시대야. 아직 정비할 곳도 많지만, 몸으로 지역의 역
수력이 국력이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돈키님, 저기 보이는 다리가 팔당대교죠? 물길이 환하게 트였네요. 돈키: 그래. 하남 창우동에서 남양주 와부읍 팔당리를 잇는 다리야. 길이만 935미터, 폭도 24미터. 비 내리던 오후에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이 제법 멋져. 저기 봐, 예봉산에서 패러글라이딩 뜨는 사람들. 독수리처럼 하늘을 원을 그리며 선회하지? 호새: 정말 悠悠 하네요. 저도 한 번 저렇게 날아보고 싶어요. 산과 들판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어떤 걸까요? 돈키: 누구나 품을 만한 꿈이지. 팔당 수변이 워낙 수려하니 사람들도 많이 몰려와. 주말이면 자전거 동호인들이 무리지어 달리고, 마주칠 때마다 손 흔들며 인사하곤 해. 탄천–경안천–팔당–춘천으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동호인들에겐 여행길이지. 호새: 팔당호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을 보면 마음이 오래 머물러요. 돈키: 고대엔 한강을 ‘아리수’라 불렀지. 그리고 삼국이 각축하던 중심이기도 했고. 근세엔 ‘한강의 기적’의 무대였어. 정치를 ‘치수(治水)’라고도 하지 않나. 법(法)도 물 수(水)자에 갈 거(去)자가 들어간 회의문자고. 결국 국력도 물을 잘 다스리느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호새: 그런 의미
상상이 세상을 바꾼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축구 보다가 출발이 늦으셨다면서요? 9시 반인데, 오늘 30km 코스가 괜찮겠어요? 돈키: 길이 부른다는데 괜찮고 말고. 경안천에서 팔당대교 지나 양수리까지 이어 걸으면 돼. 준비물도 진열대처럼 척척 정리해놨으니 걸음만 내딛으면 돼. 호새: 그런데 천변 풍경이 유난히 산뜻하네요. 어젯밤 비 때문일까요? 돈키: 오감(五感)이 밤새 쉬었는지 생기가 돌아. 광주시청 지나 상번천 삼거리까지 6km는 경보하듯 훅 지나왔어. 중부고속도로 교각 밑에 그늘? 천국이지. 배낭 베고 누워 바람 맞는 맛. ‘사서하는 고생’이라 더 편하다니까. 호새: 그래도 30km면 장거리죠. 마라톤처럼. 돈키: 그 마라톤 말인데… 매년 서너 번씩 풀코스 도전해. 지친 사람들이 골인점을 향해 비틀비틀 가는데, 응원들이 “돈 주고 뛰라면 안 뛸 거야!” 하고 웃지. 그런데도 달리는 건, 하고 싶은 일이니까 고통도 즐거움이 되는 거야. 호새: ‘마지못해 하는 사람’,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 ‘즐기는 사람’… 그런 차이가 세상을 바꾸는 건가요? 돈키: 그렇지. 증기기관, 전구, 컴퓨터… 다 상상의 발명품이지. 상상은 즐거울 때 튀어나와. 그런
등산화와 꿈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장거리 걷기엔 역시 등산화죠? 흙길, 자갈길, 아스팔트… 다 만나니까. 돈키: 그렇지.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장난 아니야. 밑창 두꺼운 신발이 충격을 흡수해줘야지. 호새: 예전에 운동화 신고 걷다가 고생하셨다면서요? 돈키: 2011년 ‘부산–화성’ 도보여정 때 말이야. 추풍령까지 운동화 고집하다가 발바닥에 불나고 물집 터지고… 그 뒤론 무조건 등산화야. 거리와 상관없이. 호새: 여름엔 또 통풍이 문제죠. 돈키: 맞아. 긴 바지에 스타킹까지 끼면 땀이 차서 걸음걸이도 어정대지. 오포 지나면서 길가에 할인 매장에서 반바지를 하나 샀어. 포켓이 여러 개라 참 편하더라고. 호새: 밀짚모자에 선글라스, 토시까지 차림이면… 험한 길 가는 분 같았겠네요. 돈키: 주인 아주머니가 보더니 어디 가느냐고 묻더라고. 안쓰러웠는지 아침에 쪘다며 옥수수 세 자루를 건네주셨지. 그 작은 정이 얼마나 고맙던지. 호새: 어머니가 해주시던 찐 옥수수 같았겠어요. 돈키: 그렇지… 비 오던 날의 냄새까지 떠올랐지. 터미널에 이를 때까지 식당 하나 없어서, 그 옥수수가 딱 든든한 간식이었어. 겨울에도 문 연다니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지. 호새: 그런
첫 물음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한화생명 연수원 근처야. 경부고속도로를 건너려면 저 낮은 지하통로로 들어가야 하지. 고개 숙여야 겨우 지나가겠어. 호새: 우기에 물이 찰 것 같은데요? 돈키: 그러게. 조명도 너저분하게… 손볼 데가 많아 보여. 호새: 지금 시간이 두 시 반 넘어겠죠? 돈키: 광주경찰서 근처에서 늦은 점심 먹었지. 식후엔 또 커피 한 잔 했고. 호새: 그래서 탄천변으로 걸어온 거군요. 돈키: 응. 자전거도로 따라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 버드나무 그늘이 길게 드리웠더라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왼편의 도시 소음이 스르르 멀어졌지. 호새: 산책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던데요. 개 데리고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이어폰 끼고 뛰는 사람… 돈키: 그것도 천변의 풍경이지. 요즘 지자체들이 하천 부지에 생태공원을 잘 만드니까 시민들 쉼터도 되고. 호새: 죽전 e마트 앞에서 냇둑을 벗어났죠? 돈키: 맞아. 보도로 올라서 광주 방향 언덕길로 걸었지. 호새: 그리고 그분을 만났군요? 돈키: 그늘 아래 앉아 계신, 한 오십 년 세월을 묵묵히 보냈을 것 같은 분인데, 용인 수지에 산다며 아파트 분양 홍보 일을 한다 하더라고. 걷는 동안 길 안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