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풀꽃 — 천변기행32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늘어진 몸을 추스르며 산책길에 나섰다. 의례 풀밭에는 토끼풀이 지천이다. 하얀 꽃송이들이 다정히 늘어서 눈에 들어오니, 덩달아 마음밭까지 환해진다.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 문득 잔잔한 여가수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련히 맴돈다. 절로 어린 시절 꽃반지를 만들며 뛰놀던 뒷동산이 떠오른다. 함께 웃고 뛰어다니던 옛 동무들의 얼굴도 하나둘 되살아난다. 마치 동문아파트 곁 안녕뜰을 함께 걷고 있는 듯하다. 제법 세찬 물살이다. 냇가에서 퍼 올린 물이 수로를 따라 논배미로 흘러든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려는 듯 속속이풀꽃은 꽃가지를 물가에 살며시 드리웠다. 최고급 봄나물로 손꼽히고 냉이나 갓과 한집안이라니, 한낱 들꽃이라 여겼던 생각이 머쓱해진다. 무심했던 편견이 어느새 뒤집힌다. 들판에도 여러 농원과 창고가 들어서며 예전의 바람길도 조금씩 달라졌다. 그래도 들바람은 여전히 건강한 숨결을 품고 지나간다. 논배미를 서넛 지나니 명아주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가벼운 몸을 지닌 덕에 쓸 만한 녀석은 훗날 지팡이가 되기도 한다. 멀대처럼 자라날 녀석들이다. 논둑에 기대선
메꽃 – 천변기행31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동서남북 문화기행 시나리오와 홀릭큐브 총정리를 마친 늦은 오후, 밀린 숨을 고르듯 천변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간 눈에 띄지 않던 메꽃이 바위 축대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토끼가 즐겨 찾는 먹잇감이기도 한 그 꽃은 귀화식물인 나팔꽃보다 몸집이 작고 여렸다. 하지만 작다고 존재감마저 작은 것은 아니었다. 뚝방길 한편에서 수줍은 미소를 띤 아이처럼 조용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터널을 지나 사람 손길이 닿은 꽃밭 곁을 걷는다. 바람이 지나가자 패랭이꽃이 살랑이며 발길을 붙든다. 술패랭이, 구름패랭이, 수염패랭이…. 이름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모여 선 모습은 어쩐지 우리네 삶과 닮아 있다. 화려하진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피어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곁에는 때 이른 쑥부쟁이가 피어 있었다. 여름과 가을이 제철인 꽃인데 사람 손길이 계절의 시계까지 조금 앞당긴 모양이다. 작약은 몽우리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마치 오래 참았던 말을 이제 막 꺼내려는 사람처럼 금세라도 꽃잎을 터뜨릴 태세다. 수로에는 물이 가득 흐른다. 보름쯤 지나면 논마다 벼모종이 심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들판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겠지.
민들레-천변기행29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저녁 산책길에는 어쩐지 뒷짐이 잘 어울린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건만, 어느새 어린 시절 골목 어귀를 느릿하게 거닐던 동네 어른들 모습처럼 서늘한 바람에 이끌려 밖으로 나선다. 뚝방길 비탈에는 민들레가 한창이다. 천연항생제라 불리는 토종 민들레의 노란빛과 흰빛, 그리고 마치 그물망 솜사탕 같은 서양민들레가 듬성듬성 피어 저마다의 봄을 흔들고 있다. 문득 조용필의 노래 한 구절이 귓가를 스친다. “해가 뜨면 달이 가고 낙엽 지니 눈보라 치네 기다리고 기다리는 일편단심 민들레야…” 애절하게 울리던 그 목소리가 저녁 하늘 어디쯤 아직도 머무는 듯하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녀석들이 어김없이 제때를 맞춰 얼굴을 드러낸다.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나니, 눈과 입에도 익숙한 벗처럼 그저 반갑고 좋다. 서너 걸음 옮기자 이번에는 개망초 군락이다. 오늘 저녁 식탁에도 올랐던 풀이다. 쌉쌀한 맛이 입맛을 돋우니, 한나절 동문체육대회에서 소진했던 몸의 기운도 다시 생기를 찾는다. 흔히 들꽃으로 지나치기 쉬운 개망초의 꽃말은 ‘화해’라고 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더욱 행복하게 해주고, 멀리 있는 사람은 다시 다가오게 만든다는 뜻을
애기똥풀-천변기행28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황구지천 뚝방길 산책에 나선지 두 달 후면 2년이다. 사계절 철따라 피고지는 꽃들과 새, 풀, 나무들이 평생지기와 함께한 벗들이다. 그간 참 고마운 녀석들이라 오늘부터 이름이라도 불러야겠다. 벼르고 별른 꽃의 이름을 부르니 이 또한 산책길에의 묘한 맛이겠다. 꽃이 님일지니 님 마중이려나. 애기똥풀, 아파트 앞 둑방길에 멋진 초병들이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시골로 부모님을 찾아뵙는 달인지라, ‘몰래 주는 사랑’이 꽃말과 또 다른,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란 꽃말에 가슴이 시리다. 기저귀에 노랗게 쌓인 애기똥, 누구나 어린시절과 내 아이, 내 손주들의 모습이 떠오를게다. 둑방길에 지천인 애기똥풀의 노랑빛깔이 바라결에 나붓거린다. 마치 아장아장 걷는 아가들의 모습인 게다. 뒤적거리니 양귀비과의 두해살이풀 이란다. 푸릇푸릇한 둑방길에 점묘법 화가의 채색이려나? 물길가에 늘어선 봄여인을 설레게하는 노란 유채꽃과 어울려 눈길을 유혹한다. 이럴 때 풀숲에 빼꼼히 솟은 씀바귀 흰꽃이 어린다. 토끼 먹이로 제격이라 줄망태기에 담아 오던 들꽃이다. 씀바귀를 오물거리던 뒤란에 긴귀를 세운 흰토끼들과 고향에
파주출판단지에서-홀릭큐브55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홀릭큐브 부스 설치를 위해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아직 도시의 온기가 채 오르기 전, 공기는 맑고 서늘했고 거리에는 하루를 준비하는 발걸음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마음은 오히려 또렷하다. 무엇인가를 ‘준비한다’는 일은 늘 설렘과 긴장을 함께 데려온다. 출판단지에 도착하니 고요가 먼저 맞이한다. 문을 연 곳은 많지 않지만, 그 고요 속에는 곧 시작될 움직임의 기운이 서려 있다. 한켠에 짐을 풀고 블록과 안내판, 체험 도구들을 하나둘 꺼내 자리를 잡는다. 단순한 설치 작업이지만 손길 하나에도 의미가 실린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웃고, 고민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순간들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동작이 정성스러워진다. 햇살이 공간 안으로 스며든다. 희미하던 빛이 점차 또렷해지며 오늘의 시작을 알린다. 그 빛 아래 놓인 홀릭큐브는 아직 조용하지만, 곧 아이들의 손을 만나 생기를 얻을 것이다. 작은 큐브 하나가 질문이 되고, 질문이 생각을 부르고, 생각이 또 다른 발견으로 이어질 흐름이 눈앞에 그려진다. 행사장에는 어린이를 위한 출간서적 전시와 다양한 부대행사로 단지는 금세 활기를 띤다. 학부모와
하나, 그리고 손길-홀릭큐브54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세상은 하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작이 있으되 시작이 없다는 말처럼, 그 하나는 늘 우리 앞에 있으면서도 붙잡히지 않는다. 천부경은 이를 숫자로 접어 말했고, 도덕경은 이름 붙일 수 없는 흐름이라 했다. 붙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내려놓으면 비로소 드러나는 것. 반야심경은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다 말하며, 주역은 세상이 끊임없이 바뀌는 자리라 일러준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리학은 흔들림 속에서도 지켜야 할 이치를 말한다. 그런데 또 다른 길이 있다. 성경은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으로 세상이 지어졌다고. 여기서 하나는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의지이며 관계다. 창조는 우연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인간은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문득 아이의 손에 들린 큐브를 본다. 맞추고, 흐트러뜨리고, 다시 돌린다.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이 모든 이야기를 닮아 있다. 질서와 혼돈이 교차하고, 흐름과 선택이 겹쳐지며, 보이지 않는 규칙이 결과를 만든다. 어떤 이는 그것을 ‘도’라 하고, 어떤 이는 ‘공’이라 하며, 어떤 이는 ‘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말
얼굴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노랫말처럼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아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선사의 말씀이 떠오른다. “태어나기 전 80년의 얼굴이요, 죽은 뒤 80년의 얼굴이로다.” 얼이 담긴 굴, 그래서 얼굴이다. 얼굴은 한 인간의 시간과 삶이 스민 자리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그 말이 향하는 곳 또한 얼굴이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 역시 생명을 품은 존재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씻는다. 단지 위생이 아니라 스스로를 대하는 최소한의 태도다. 이제 그 얼굴들이 공적인 선택의 장에 섰다. 곧 다가올 지방자치선거, 출마한 이들의 얼굴이 세상에 걸렸다. 유권자는 묻는다. 저 얼굴이 우리의 삶을 담아낼 수 있는가. 한때 우리는 거리 위에 놓인 얼굴을 밟았다. 의견의 표현이라 했지만, 그 방식은 결국 존엄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일회적 장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상대의 얼굴을 지우고, 짓밟고, 낮추는 방식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얼굴은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얼굴에는 가족이 있고, 시간이 있고, 책임이
저 달을 향하여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화성에서 띄우는 편지> 500회. 5년의 시간이 쌓여 한 줄의 길이 되었다. 흘러간 날들이 문장이 되었고, 문장들은 어느덧 나를 이루는 시간이 되었다. 졸졸 흐르던 방학일기의 실개울은 이제 제법 물살을 이루어 모래톱을 만들고 방향을 틀 줄 아는 강이 되었다. 계절을 건너며 적은 감상, 일상과 세상에 대한 짧은 촌평, 역사와 문화, 그리고 천변을 따라 걸은 기행들. 쉰여 회의 기획글까지 더해져 나는 나도 모르게 하나의 흐름 속에 서 있다. 돌이켜보면 체계도 없고, 의도도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눈길 머무는 대로 적어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 무심한 기록들이 어느새 500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만들었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시인으로서도, 기행 작가로서도, 또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으로서도 깊이 발효된 한 맛을 이루었다 말하긴 이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나는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글의 마루턱에 서서 묻는다. 지금까지의 글이 ‘올라온 길’이라면, 앞으로의 글은 어떤 ‘내려갈 길’이 될 것인가. 어느 원로의 말처럼 평생은 공부이고, 한 편의 시처럼 심장
왜, 왜, 왜 – 홀릭큐브53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쉼 없이 이어온 홀릭큐브 이야기를 이제 매듭지으려 한다. 수십 회에 걸친 질문과 사유의 여정은 결국 하나의 물음으로 모인다. 우리는 왜 묻는가. 안동 동남쪽, 고요한 산자락 아래 자리한 정정(鼎井)재를 다녀왔다. 퇴계의 스승, 역동 우탁 선생의 숨결이 깃든 그곳. 화성에서 천 리 길을 건너 도착한 뜨락에는, 말보다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바람은 눈 녹은 흙내음을 실어 나르고, 손끝에 닿는 흙의 감촉은 묵직하게 살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문득 깨닫는다. 배움이란 멀리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서 움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는 묻는다. “이게 뭐야?” 철인은 묻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질문의 깊이는 다르나, 그 뿌리는 하나다. ‘왜’라는 물음. 이는 지식 이전의 본능이며, 존재를 밀어 올리는 생명의 힘이다. 우리는 묻기에 살아 있고, 묻기에 나아간다. 그러나 삶은 늘 순탄치 않다. 신체와 환경, 경제의 무게는 저마다의 꽃을 더디게 피운다. 그럼에도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작은 ‘왜’ 하나가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돌이켜보면, 인류의 모든 진보 또한 그러했다. 불을 다루고, 하늘을 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