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저씨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양평에서 횡성까지 여정이야.
용문면, 단월면, 청운면사무소를 거쳐 횡성까지… 56킬로, 140리 길이지.
호새: 하루 일정이 늦어졌네요?
돈키: 그래. 다시 양평군청에 도착한 게 새벽 다섯 시쯤이었어. 서둘러야 했지.
호새: 그래서 바로 걷기 시작한 거예요?
돈키: 네 구간으로 나눴어.
속도 조절하려고.
등산화 끈을 단단히 다시 묶고,
가슴 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15시간을 걸어야 하는 하루… 다짐 같은 거지.
호새: 경계를 넘어가는 길이었죠?
돈키: 그래.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구간.
호새: 주변 풍경은 어땠어요?
돈키: 산이었지.
온통 산.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
한 굽이 돌면 또 한 굽이, 전부 오르막이었지.
인내심이 없으면 못 버틴다.
호새: 물은요?
돈키: 채워 온 물이 바닥났어.
날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솔직히난감했다어.
호새: 차라도 세우지요…
돈키: 그럴 수가 없었지.
그래서 혹시 도움 될까 싶어 솔잎을 씹었다.
호새: 그때 물소리가 났던 거죠?
돈키: 그래.
계곡 아래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내려갔다 올까 말까… 한참 갈등했어.
호새: 그러다?
돈키: 패널 건물이 보였거든.
‘저기엔 물이 있을까’ 싶어서 뛰어갔지.
홍천 국토관리소 작업대기소였다.
호새: 사람 있었어요?
돈키: 있었지.
그게 얼마나 반갑던지.
말을 건넬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호새: 뭐라고 했나요?
돈키: 내 얼굴 보자마자 그러더라.
산 아저씨: “물 필요하시죠?”
돈키: 더 말도 안 했지.
얼음 물병 두 병이랑,
가면서 마시라고 빈 통까지 채워 줬다.
호새: 진짜 구세주네요.
돈키: 여름 무더위에 산신령이 사람 얼굴로 내려온 느낌이었어.
김삿갓이었으면 시 한 수 했겠지.
호새: 체력은요?
돈키: 마라톤 풀코스 골인지점 다다를 때 그 느낌.
온몸이 탈진해서 뭐든 마실 걸 찾게 되지.
호새: 그때 물 주시던 분의 말씀 기억나요?
돈키:기억나지.
도우미: “이 다음에 열 배로 갚으세요.”
돈키: 그땐 허리 굽혀가며 대답했지.
돈키: “네… 네…”
호새: 그런데…
돈키: 그게. 쉽지 않아.
살면서 고마운 경우가 한두 번도 아닌데
그때뿐일 때가 많지.
호새: 어른 말씀이 떠오르죠?
돈키: “사람은 나잇값을 해야 한다.”
무겁게 남는다.
실천해야 하는데…
호새: 산이 사람을 흔드나보죠?
돈키: 산 기운이 본성을 깨우는 느낌이었다.
호새: 길은 잃지 않았죠?
돈키: 왠걸, 횡성시 어귀에서 길을 잃었지.
50킬로 가까이 걷고 나니
지도를 보는 것도 소홀해지더라고
그게 화근이었어.
호새: 얼마나 돌아갔어요?
돈키: 한 시간은 족히 소비했어.
시가지로 돌아가는 길이 지루해졌지.
호새: 옛말 생각나겠네요.
돈키: “길 잃은 자의 갈 길이 멀다”
그 말이 딱 맞더군.
온 거리보다 남은 거리가 더 멀게 느껴졌다.
호새: 늦게 도착했겠네요?
돈키: 밤 9시경 쯤
늦지 않으려고 산중에서, 청운면을 지나며 뛰었어.
호새: 열린 음식점도 없을텐데…
돈키: 마트 들러서 먹을 것을 사서
숙소 돌아와 허기부터 달랬어.
호새: 씻기는 했어요?
돈키: 대충 씻고,
그냥 몸을 자리에 던졌어.
호새: 힘든 하루 일정이네요?
돈키: 지루했던 하루였지.
그리고…이내
어둠 속에서 시간이 멈췄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