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될 때, 세계는 태어난다-홀릭큐브16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흔히 존재를 ‘하나’로 생각한다. 분리된 개체, 독립된 실체로서의 나와 너.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어떤 것도 홀로 완전한 것은 없다. 하나의 점은 그 자체로 고요할 뿐, 방향도 의미도 드러내지 않는다. 점이 다른 점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선이 생기고, 선이 겹치며 면이 되고, 면이 쌓이며 입체가 된다. 세계는 이렇게 관계 속에서 모습을 갖춘다. 앞선 이야기에서 우리는 ‘보는 자’가 세계를 드러낸다는 것과, ‘비어 있음’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품은 자리임을 살폈다. 그렇다면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가능성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가? 그 답은 ‘연결’에 있다. 비어 있음은 공허가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이는 통로이며 만남을 위한 여백이다. 채워져 있기 때문에 닫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기 때문에 열리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 경험을 지닌 채 살아가지만, 그 차이로 인해 단절되기보다 오히려 연결의 필요를 느낀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 손짓 하나가 서로를 향한 다리가 된다. 그 다리를 건너는 순간, ‘나’와 ‘너’는 더 이상 고
비어 있음은 왜 충만한가-홀릭큐브15 — 공(空)과 진공, 그리고 가능성의 구조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비어 있음을 두려워한다. 무언가 없다는 것은 곧 결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채워야 한다고 믿고, 비어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일까? 하나의 점을 떠올려 보자. 점은 작고,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방향도, 형태도, 의미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점은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어디로든 이어질 수 있다. 이 단순한 구조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비어 있음은 없음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음이다. 이 통찰은 중관학에서 말하는 공(空)과 만난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드러나고 조건이 바뀌면 사라진다. 그래서 공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열려 있음이다. 이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 보자.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미세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입자와 반입자가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보이지
보는 자가 우주를 만든다-홀릭큐브14 — 유식과 물리학, 그리고 홀릭큐브의 한 지점에서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연히 접한 우주생성에 대한 의문 글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점 하나,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가능성 하나가 고요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그 떨림이 곧 연결을 낳았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갈라지며 방향을 얻었다. 우주는 그렇게 하나에서 나뉘어졌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우리를 둘러싼 네 가지 힘은 마치 서로 다른 언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세계에 왜 네 개의 법칙이 필요한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흩어진 현상 속에서 질서를 발견했다. 전기와 자기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었다. 이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더욱 과감한 질문을 던졌다. 힘이란 정말 존재하는가? 그의 대답은 놀라웠다. 중력은 힘이 아니라, 휘어진 시.공간이었다. 그 순간, 세계는 단단한 물체의 집합이 아니라 구조와 관계의 장으로 바뀌었다. 하여 더 작은 세계로 들어가니 이 질서는 다시 흔들렸다. 입자는 입자가 아니었고 존재는 고정되지 않았으며 관측 이전의
멍때리기–의식의 귀환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휴일이다. 시간이 잠시 나를 내려놓는 날.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선다. 발걸음은 이유 없이, 그러나 정확히 팔달문으로 향한다. 봄은 방향을 알고 있는 듯하다. 로데오거리를 지나 행궁으로 이어지는 길, 사람들은 흐르고, 언어는 섞이고 표정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은 채 스쳐 지나간다. 나는 그 사이에 서서 점점 나를 잊는다. 행궁마당— 유모차의 속도, 킥보드의 리듬, 오토바이의 진동, 그리고 달고나의 달콤한 냄새, 솜사탕처럼 가벼운 웃음들. 모든 것이 살아 있는데 나는 잠시 멈춘다. 전통체험관 앞, 제기차기, 굴렁쇠, 사방치기, 투호— 아이들의 움직임이 시간의 오래된 결을 두드린다. 그때, 나는 멍해진다. 생각이 멈추고 판단이 사라지고 이름 붙일 필요 없는 세계가 열린다. 의식이 풀리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그리고— 부활절 리허설의 마이크소리. 청년들의 몸짓이 벚꽃처럼 흩어지고 공기는 보이지 않는 리듬으로 진동한다. 햇살은 더 깊어지고, 하늘 위 해를 향해 여객기 한 대가 빛을 가르며 지나간다. 그때, 아이의 손을 떠난 연— 두 날개를 편 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하늘로 올라간다. 나는 그 연을 따라 다시 나를
나비야, 천변 가자 – 천변기행27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비 갠 오후, 천변의 공기는 막 씻겨 나온 얼굴처럼 맑다. 하얀 나비 한 마리, 노란 민들레 위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이내 가볍게 떠난다. 머무름보다 떠남이 더 자연스러운 존재처럼. 뚝방길을 따라 걷는다. 봄기운은 아직 그늘에 머물러 있으나 꽃들은 이미 길 위로 나와 사람을 먼저 맞이한다. 비탈의 구절초는 빗방울을 기억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유채꽃은 바람에 기대어 물가와 장난을 나눈다. 늘 보던 풍경 속에서도 오늘은 사소한 것들이 먼저 말을 건넨다. 청둥오리는 물 위에 시간을 띄우고, 참새들은 덤불 속으로 스며들어 햇살을 잘게 쪼개며 논다. 익숙해진 발소리 때문일까, 자연은 이제 나를 경계하지 않는다. 담장 위 개나리는 노란 숨결로 길게 이어져 봄이라는 하나의 문장을 완성한다. 그 아래, 푸른 보리는 아직 어린 몸으로 세상의 빛을 배우는 중이다. 문득, 노랑나비 한 마리가 시야를 스친다. 아주 오래전, 아이처럼 불러보던 노래가 가볍게 되살아난다. “나비야, 나비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마음은 이미 그 리듬 위에 있다. 나비는 여전히 날고, 나는 여전히 바라본다. 다만 달라진 것은 쫓아가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길, 흔들리는 일상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문명은 가까움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이 오히려 더 깊은 방식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연일 뉴스에 오르는 중동의 전쟁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고대 유라시아를 가로지른 실크로드는 단순한 교역로가 아니었다. 물자와 함께 기술과 감각, 사유가 이동하던 길로, 서아시아의 공예와 유리 문화는 동쪽 끝 신라에 스며들어 또 다른 미감으로 재탄생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문명은 이렇게 이어졌다. 중세에 이르러 원나라가 거대한 질서를 형성하면서, 이란을 포함한 이슬람 문화권의 흐름은 동쪽으로 확장되었지만, 그 흐름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 고려의 복식과 생활양식, 이른바 ‘고려양’은 오히려 제국의 중심으로 스며들어 유행이 되었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작용했지만, 문화는 아래에서 위로 번져갔다. 근현대에 들어 두 지역의 직접 교류는 줄어들었지만, 구조는 닮아갔다. 강대국 사이에서의 긴장, 전통과 근대 사이의 갈등, 자주성을 둘러싼 선택의 문제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반복되었다. 이란과 한반도는 각기 다른 자리에서 비슷한 질문과 마주해 왔다. 오늘날 이 연결은 더욱 현실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중
우리는 묻는다 – 홀릭큐브 13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오래된 물음을 하나의 구조로 바라본다. 점에서 시작해 선으로 이어지고, 면으로 펼쳐져 입체로 쌓이고, 마침내 보이지 않는 연결로 흘러가는 하나의 길. 그것이 곧 우리의 역사다. 처음은 점이다. 밤하늘에 찍힌 하나의 별. 그 작은 빛 앞에서 인간은 멈춰 서고, 비로소 묻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흩어져 있던 수많은 점들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질문이 되었고, 시선이 되었고, 세계의 시작이 되었다. 점이 이어져 선이 된다. 점과 점 사이에 길이 생긴다. 바람을 타고 사막을 건너(실크로드) 빛과 물건과 생각이 흐른다. 먼 곳의 별을 읽던 눈이(천문) 다른 땅의 언어와 만난다. 보이지 않던 세계가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는 누구와 이어져 있는가. 선이 모여 면이 된다. 질서가 생기고 세계가 펼쳐진다. 말과 활, 이동과 방향, 그 모든 흐름 속(고대 문화)에 이미 하나의 구조가 자리 잡는다. 서로 다른 문명은 하나의 면 위에서 겹치고 스며들며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어떤 구조 속에 있
꽃대궐 차린 동네–천변기행 26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고향의 봄> 노랫말처럼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다. 황구지천을 따라 송산교를 건너 왼편으로 접어들면 아파트 담장을 따라 늘어선 벚꽃들이 하얀 숨결로 길을 덮는다. 그 길은 어느새 발걸음마저 머뭇거리게 하는 봄의 궁궐이 된다. 입구에 노란 개나리가 먼저 웃고, 탐스럽게 부푼 목련 봉오리는 하얀 속살을 열 준비로 설렌다. 그 곁을 스치는 마음 또한 어지러워, 그만 환해진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흘러간 노래 한 줄이 꽃잎 사이로 다시 피어난다. 귀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듣는다. 때가 되면 제 모습으로 피어나는 꽃들처럼 우리의 마음도 제 철을 잊지 않는다. 산수유에서 매화로, 벚꽃에서 진달래로 이어지는 봄의 행렬— 해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자연의 약속 앞에 나 또한 한 떨기 꽃이 된다. 가슴 한켠이 저릿해지고 온몸의 세포가 조용히 흔들린다. 이 감정, 이 떨림—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 이 땅, 이 봄 꽃으로 숨 쉬는 이 계절 속에서 나는 잠시 나로서 피어 있는다.
나를 보러 와요ㅡ천변기행 25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오후나절, 아파트 한켠에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빈 화분들이 사람의 손길을 만나 다시 숨을 얻었다. 봉사단과 주민들이 함께 흙을 고르고 꽃을 심자 금세 울긋불긋 제 얼굴을 드러낸다. 그 풍경을 바라보니 문득, “외로울 땐 나를 보러 와요, 울적할 땐 나를 보러 와요” 어느 여가수의 환한 미소와 함께 흘러나오던 노랫말이 마음에 스민다. 천변에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발걸음을 붙잡는다. 잠시 멈춰 바라보니, 꽃 앞에서 사람의 시간도 비로소 느려진다. 꽃이 제때 제 모습으로 피어나듯 사람 또한 그러한 존재일까?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 그 모든 시간이 모여 하나의 향기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그것은 존재를 꽃으로 피워내는 일일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중에서, 김춘수 며칠 전 선산에서 꺾어온 앵두꽃이 거실 한켠에서 은은한 향을 건넨다. 그 시절의 노랫말 한 구절이 잊고 있던 청춘을 살며시 흔들어 깨운다. 오늘 하루, 발길 닿는 곳마다 꽃을 만나
다리를 건너며-천변기행 24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번잡했던 한 주의 흐름이 멎은 휴일, 몸과 마음이 한결 느슨해진다. 활짝 핀 천변의 개나리와 마주하는 시간이다. 뚝방길을 따라 사십여 분을 걷자, 화성에서 오산으로 건너는 세마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인도가 없는 탓에 좁다란 난간을 더듬듯 건넌다. 매번 걷던 산책길의 반대편, 낯선 길이 오히려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한다. 황구지천은 국가준용하천답게 널따란 모래톱을 품고, 물길은 유연하게 굽어 흐른다.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버드나무들이 천변의 운치를 더하지만, 가시박 덩굴에 뒤덮인 나무들은 숨을 쉬지 못한 채 서서히 말라간다. 자연과 어우러진 이 풍경이야말로 하나의 공원일 터, 제철을 맞은 개나리조차 제 빛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이 못내 아쉽다. 이곳에도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때다. 그 생각을 품은 채 걷다 보니, 동탄에서 안녕리 들판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다리를 만난다. 광교산에서 서해까지 이어지는 물길 위에는 수십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양편을 이어주는 단순한 구조물이라기보다, 삶과 삶을 잇는 통로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문득 다리는 기억을 건너게 하는 장치처럼 다가온다. 어느 소설 속 징검다리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