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발원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선배님 집에서 마시는 물이 다 여기서 온다는 거죠? 오대산… 이름만으로도 기운이 납니다.
돈키: 그래. 정상 비로봉이 1,563미터지. 백두대간 줄기라 등산객들도 많이 올라오고.
두물머리에서 본 그 남한강 물줄기, 저기서 출발해 거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생각하면 참 묘해져.
호새: 오늘은 오히려 ‘시간을 잊자’고 나온 건데, 또 시간을 세고 계시네요?
돈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지. 잊으려 하면 더 또렷해진다.
자, 산자락 오르막이 시작이다. 저기 봐라. 소나무, 잣나무, 떡갈나무… 이름도 모를 풀꽃들이 눈길을 끄네.
손길이 덜 닿은 숲이라 그런지, 제멋대로인데도 조화롭지 않냐?
호새: 해발 800미터 산책길… 고요하네요.
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돈키: 인적도, 차량도 없으니 더 고요하지. 오래간만에 고독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다.
이럴 때 내 안의 ‘내’ 모습을 드러내. “왜 이 길을 걷고 있나?” 하고 묻거든.
호새: 다시 이 길을 걸 기회가 있을까… 그런 마음이죠?
돈키: 그렇지.
저기 자작나무를 봐. 매미가 허물 벗어놓은 듯 흰 몸통을 드러내고 줄지어 서 있구나. 풍욕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호새: 아, 대관령 휴게소가 보이네요.
9시 40분… 약속한 일행은요?
돈키: 교통체증에 늦는다네. 우린 먼저 옥수수 하나에 커피 한 잔씩하며 쉬어가자.
동서양이 만난 퓨전 간식이지, 하하.
호새: 이 조합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마음도 조금은 느긋해졌어요.
돈키: 드디어 보인다, 저기 대관령 고개. 도보여정 시작할 때 얼마나 상상하고 기다렸던 곳인데…
이제 거의 다왔어. 양떼목장 쪽으로도 가보자.
<오래된 미래>-양떼목장
신재생에너지
호새: 선배, “양 떼를 몰고 가는~” 그 노래가 절로 떠오르네요.
저 멀리 풍경이 동화 같아요.
돈키: 그러게. 알퐁스 도데의 ‘별’ 속 스테파노 아가씨 웃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지 않냐?
저기 멜빵바지 입은 목동이 산기슭에 어른거리면… 마음이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가.
호새: 비 갠 뒤 솔잎이 더 푸르러 보이듯, 사람 마음도 이렇게 파릇해지는군요.
양, 아가씨, 목동, 피리… 그 낱말들만으로도 풍경이 만들어지네요.
돈키: 그래서 목장은 사람을 순하게 만들지. 긴 여정에 쌓인 피로도 물감 번지듯 스러지거든.
자, 하늘도로 건넌다. 영동고속도로 위를 지나니—
오, 저 풍차 좀 봐. 거대한 날개가 돌아간다.
호새: 바로 옆이 신재생에너지 전시관이네요.
‘양떼와 신재생에너지’라… 참 묘한 조합입니다.
돈키: 그래도 생각해보면 낯설기만 한 것도 아니야.
내가 자랐던 병점도 그랬어. 지금은 도심이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골마을이었지.
집집마다 소, 돼지, 염소, 닭, 토끼… 안 키우는 집이 없었어.
추수철엔 바람으로 나락을 날려 알곡을 모으고, 햇살에 고추 말리고, 절구로 곡식을 찧고….
호새: 자연의 힘을 그대로 쓰던 시절이군요.
돈키: 그렇지. 인력, 축력, 풍력, 태양광, 수력…
지금 거대한 단지로 세워진 신재생에너지도 결국 그 원형이 시골마을의 삶이야.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에 나온 ‘라다크’처럼 말이지.
호새: 그러고 보니 우리가 도보로 걷는 것도… 원형을 되찾는 여정이네요.
돈키: 맞아. 봇짐이 배낭으로, 짚신이 등산화로 바뀌었을 뿐이지.
자, 이제 마루턱을 향해 올라가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