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품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해안도시―강릉]
강릉시청 앞
호새: 드디어 바다네요. 저기 보이는 게 동해죠?
돈키: 그래. 강릉이다.
서해에서 출발해 동해까지, 700리.
말로는 짧아 보여도, 두 발로 걸으면 인생 한 토막이지.
호새: 8일이나 걸렸잖아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돈키: 힘들었지.
그래서 더 대견하다.
오감이 깨어 있고, 시간의 결이 손에 잡힌다.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듯, 나는 내 길을 걸었을 뿐이야.
호새: 도시는 번잡한데, 마음은 오히려 조용해 보여요.
돈키: 강릉이 그런 곳이야.
잠시라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깨어 있는 삶, 겸손한 마음…
몸이 먼저 배워버렸어.
호새: 도착하니까 꽃다발이랑 현수막까지…
조용한 여정 아니었어요?
돈키: 하하.
조용히 떠났는데, 성대하게 끝났지.
아무 탈 없이 걸었으니, 두 손 모을 일이지.
[힐링호수 ― 경포대]
차 안, 주문진으로 가는 길
호새: 여기가 경포대예요?
호수가 거울 같아요.
돈키: 그래.
청명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라,
깊어서 마음을 끌어당기는 호수지.
호새: 빛에 비친 물결이 은비늘 같아요.
돈키: 지나온 시간들이 저기 담겨 있지.
사유의 둘레길이야.
어릴 적, 교실 유리창 닦고 나서
세상이 뚜렷해 보이던 순간처럼.
호새: 마음이 씻기는 느낌이에요.
돈키: 그래서 망각의 호수라 부른다.
아이 눈빛 같은 곳이지.
호새: 풍덩, 뛰어들고 싶네요.
돈키: 이미 마음은 자맥질하고 있잖아.
[어머니! ― 오죽헌]
오죽헌 앞
호새: 여긴 분위기가 달라요.
조용한데 묵직해요.
돈키: 어머니가 계신 곳이니까.
삶이 고단할수록, 생각나는 이름이 있지.
호새: 신사임당… 율곡 이이…
돈키: 그 이름들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어머니’라는 호칭이야.
호새: 왜 갑자기 대장금 이야기를 하세요?
돈키: 그 대사가 참말이지.
“집안의 노비로 태어나 궂은일을 다했지만
모든 사람의 스승이었던 여인…
살아 있을 때는 태산 같았고
떠나고 나니 세상이 물에 잠겼다는 이야기.”
호새: 어머니들이 다 그런 존재죠.
돈키: 맹모의 삼천지교,
한석봉의 어머니,
율곡을 키운 신사임당,
출근길에 다 큰 아들 안아주는 아내까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고, 세상 아내들의 모습이지.
호새: 오늘은 뭐 하시고 계실까요?
돈키: 그러게.
세상의 품은 결국 어머니 품이야.
저 동해바다처럼. 어울리는 싯구가 생각나네.
[어머니]
넘쳐 흐르는 그리움
터질 듯한 사랑이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고
그리워 그리워해도 싫증나지 않는
마음속으로 크게 불러본다.
어머니!
………….김영미, <작은 사랑 작은 행복>에서
<태양이 솟는다 ― 일출>
이른 새벽, 바닷가
호새: 해가 뜹니다.
정동진의 아침이네요.
돈키: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영화 알지?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호새: 절망 속에서도 꿈을 말하던 장면요?
돈키: 그래.
횡단을 끝내니 몸이 가볍다.
생각은 더 뜨거워졌고.
호새: 파도가 동그랗게 번져가요.
돈키: 동심원처럼,
내 마음도 바다 위로 퍼진다.
가진 것을 세기보다
가질 수 있는 꿈을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호새: 여정의 끝이 시작 같아요.
돈키: 그래.
가슴에 태양이 솟는다.
호새: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돈키: 하나뿐이야.
(천천히):
나는 나를 사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