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시선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세상에 조용한 날이 과연 있기나한가? 머나먼 호르무즈 해협에서 비롯된 국제 정세의 파장이 어느덧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여파일까. 국내의 경제, 국방, 외교, 사회 전반에 걸쳐 갈등과 충돌의 언어가 일상이 되어버렸다.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상생’과 ‘공생’은 책 속에 꽂힌 채 꺼내 들기조차 버거운 단어가 되었다. 마치 겨울을 지나 바싹 말라버린 시래기처럼, 존재는 하지만 생기를 잃은 채다. 문득 백치 아다다와 벙어리 삼룡이가 떠오른다. 정상이라 불리지 못했던 이들, 그러나 누구보다 순수했던 존재들. 그 순수함은 보호받지 못했고, 오히려 세상의 냉혹함 속에서 더 쉽게 부서졌다. 지금 우리의 사회 역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은 점점 사라지고, 시스템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은 분절된다. 조직은 커지고, 개인은 작아지며, 결국 집단의 힘은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둠이 깃든다. 말을 업으로 삼아야 할 자리에서조차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권력을 향해 고개를 드는 ‘해바라기’들이 줄지어 선다고 한다. 거리에는 사계절 내내 현수막이 나부
가슴이 설레는 말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세상에서 가장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 곰곰이 떠올려보면, 결국 ‘어머니’라는 말에 이르게 된다. 여자아이가 여인이 되고, 마침내 어머니가 되어가는 그 여정. 그 속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늘 저만치 앞서 걸어가며 길을 열어주고, 끝내는 한 세상을 다하여 돌아가시는 우리네 어머니들. 그 뒷모습을 떠올리면, 문득 한 노랫말이 가슴을 파고든다. “고달픈 인생 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그 애잔한 울림이 지금껏 귓가에 머문다.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던 중, 필자에게 또 하나 가슴 설레는 말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청춘’, 그리고 ‘청년’이다. 모교 졸업생들이 모여 만든 한 모임의 이름이 아이러니하게도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여섯마디 후반에 이른 나이임에도,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모임에 나설 때마다 마음만은 다시 젊어진다. 두 돌을 맞은 그 모임에서 은사님과 재학생, 학생회장단, 운동선수단 후배들, 외부손님들과 한자리에 모여 나눈 정담은 마치 삶의 열두마디 가락 중 힘차게 울려 퍼지는 앞마당 같았다. 그 자리에는 생동하는 기운이 있었고, 세월
유붕자원불역낙호아(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나는 인연 앞에서 이 말은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달포전 약속된 군동기생들의 문화탐방, 관내 융·건릉을 찾았다. 젊은 시절 푸른 제복을 입고 청춘을 함께했던 이들,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진다. 융·건릉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역사적 의미를 넘어,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린 사색의 공간이다. 인기 드라마 속 군주(이산)의 서사와 달리, 오늘의 이곳은 고요한 산책길로 우리를 맞는다. 진달래와 개나리, 솔과 참나무가 어우러진 봄의 풍경 속에서 바람마저 부드럽게 흐른다. 자연은 계절을 노래하고, 사람은 그 속에서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해설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정조라는 인물이 단순한 군주를 넘어 개혁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를 지닌 존재로 다가온다. 화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 구상과 지역 개발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기생 중 한 명의 해설이 이어지며 탐방은 더욱 풍성해진다. 각자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자연·생태와 홀릭큐브-홀릭큐브32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자연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본다. 황구지천을 따라 흐르는 물길과 들판,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속에 놓여 있다. 자연은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연결된 구조다. 홀릭큐브의 시선으로 자연을 들여다보면, 모든 생태는 ‘점’에서 시작된다. 민들레 씨앗 하나, 물방울 하나와 같은 미세한 존재는 이미 완전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점들은 이어져 ‘선’이 되고, 물길과 바람, 생명의 이동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흐름은 들판과 숲, 습지라는 ‘면’으로 확장되며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는 터전을 형성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연은 다시 ‘입체’로 나아간다. 비가 내려 땅으로 스며들고, 증발해 구름이 되어 돌아오는 순환 속에서 생명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관계’로 완성된다. 꽃과 나비, 물과 물고기,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기대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환경 문제는 이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흐름을 막고, 순환을 끊고, 연결을 잊어버린 결과다. 자연은 끊임없이
동양고전(철학구조)과 홀릭큐브–홀릭큐브31 사유로 완성되는 구조의 길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동양고전을 통해 사유의 뿌리를 만난다. 노래가 감정을 흔들고, 영화가 삶을 비춘다면, 고전은 존재를 묻고 길을 제시한다. 수천 년을 건너온 문장들은 인간과 세계를 꿰뚫는 구조의 언어다. 홀릭큐브가 말하듯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며, 마침내 입체로 확장된다. 동양고전은 그 구조를 사유로 완성한다. 존재의 시작, 점은 근원에 대한 물음이다. <도덕경>은 “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라 말하며 모든 것 이전의 하나를 가리킨다. 이어 <논어>는 인간의 도리와 관계를 통해 삶의 방향을 선으로 이어간다. 개인의 물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면으로 확장된다. 이제 구조는 사회로 나아간다. <맹자>는 인간과 공동체의 정의를 말하며 사유를 입체로 세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균열을 품는다. <장자>는 경계와 분별을 하물며 우리가 붙들고 있던 구조의 흔들림을 드러낸다. 이 균열 속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하여 시선은 확장된다. <반야심경>은 “공”의 사유로 존재를 비우며 새로운 구조를 연다. 나와 세계
전통춤과 홀릭큐브 –홀릭큐브30 홀릭큐브 몸으로 짓는 우주의 구조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몸은 기억한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한 시간을, 춤으로 풀어낸다. 전통춤을 홀릭큐브의 구조 위에 올려보면 그 안에 흐르는 질서가 더 또렷해진다. 점에서 시작해, 연결로 완성되는 길. 그 길 위에 몇 개의 춤을 다시 세워본다. 점, 존재의 깨어남(승무). 고요 속에서 시작되는 떨림이다. <승무>는 움직이기 전에 이미 시작된다. 앉아 있는 그 순간, 호흡 하나로 공간이 바뀐다. 장삼 끝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 그것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내면의 파동이다. 점은 작지만, 그 안에는 이미 전체가 들어 있다. 승무는 말한다. “춤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된다.” 선, 흐름의 자유(한량무). 점이 풀리면 선이 된다. 한량무는 자유로운 선이다. 격식 속에 있으되, 그 틀을 가볍게 넘나든다. 부채를 들고 걷는 몸짓, 흐트러진 듯 이어지는 발걸음. 그 선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구속되지 않는다. 풍류와 여유, 그리고 인간적인 멋. 한량무의 선은 말한다. “삶은 흐르는 것이지, 묶이는 것이 아니다.” 면, 공간의 질서(처용무). 선이 모이면 공간이 드러난다. 처용무는 질서의 춤이다.
한국영화와 홀릭큐브 –홀릭큐브29 -현실에서 길어 올린 구조의 울림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한국영화를 통해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본다. 낯선 세계를 그리는 할리우드와 달리, 한국영화는 삶의 결을 파고들며 현실의 구조를 드러낸다. 웃음과 눈물, 분노와 연민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이 드러난다. 홀릭큐브가 말하듯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며, 마침내 입체로 확장된다. 한국영화는 그 구조를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증명한다. 존재의 시작, 점은 질문에서 깨어난다. <Oldboy>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존재를 흔든다. 이어 <Peppermint Candy>는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한 인간의 삶을 선으로 이어간다. <Architecture 101>은 첫사랑의 기억을 통해 관계의 면을 펼친다. 이제 구조는 사회로 확장된다. <Parasite>는 계층이 교차하는 현실 속에서 입체적 구조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입체는 흔들린다. <Burning>은 설명되지 않는 불안과 균열로 내면을 흔든다. 이 균열 속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세운다. <A Taxi Driver>는
영화와 홀릭큐브 –홀릭큐브28 -서사로 완성되는 구조의 확장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영화를 통해 또 한 번 성장한다. 노래가 감정을 흔든다면, 영화는 시간 속에서 삶의 구조를 드러낸다. 한 장면, 한 인물, 한 선택이 모여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홀릭큐브가 말하듯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며, 마침내 입체로 확장된다. 영화는 이 구조가 살아 움직이는 서사다. 존재의 시작은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The Matrix>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점을 찍는다. 이어 <Forrest Gump>는 선택과 흐름 속에서 선을 만든다. <Titanic>의 만남은 관계의 면을 펼치고, <Parasite>는 개인을 사회라는 입체 속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구조는 완전하지 않다. <Joker>는 입체의 균열을 드러내며 인간의 내면을 흔든다. 이 균열 속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세운다. <The Pursuit of Happyness>이 보여주듯 무너지지 않은 구조는 진짜 구조가 아니다. 이후 시선은 확장된다. <Interstellar>는 인간의 선택을 우주적 의미로 끌어올리고, &
팝송과 홀릭큐브-홀릭큐브27 -세계 감각의 확장 구조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이미 노래를 통해 성장해왔다. 동요에서 세상을 배우고, 대중가요에서 감정을 익히며, 민요에서 삶의 뿌리를 만났다. 이제 시선을 조금 더 넓혀 세계의 언어, 팝송 속에서 우리 의식의 확장 구조를 들여다본다. 홀릭큐브는 말한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며, 마침내 세계와 연결된다고. 팝송은 연결 이후, 구조가 울리는 지점이다. 사례를 들어보자. 존재의 시작 (점)으로, “나는 누구인가” John Lennon의 <Imagine>, 경계 없는 상상으로 하나의 점으로 우주에 놓인다. 이은 감정의 흐름(선)으로, “나는 느낀다” The Beatles의 <Let It Be>엔 감정은 흐르고 나를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것이 선의 흐름이다” 관계의 형성(면)으로 “너와 내가 만난다” Ed Sheeran의 <Shape of You>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 면이 펼쳐지고 관계가 생겨난다. “이 지점에서 면이 형성된다” 이젠 사회적 연결(입체)로 이어져 “우리는 함께한다”. USA for Africa-<We Are the World>, 연결은
화성에서 띄우는 편지 467 불리는 동요로 읽는 삶의 구조 – 홀릭큐브 26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가 어린 시절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불렀던 동요들에는, 의외로 삶의 본질을 비추는 단서가 담겨 있다. 단순한 가락과 반복되는 가사 속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관계를 맺는 태도, 그리고 성장과 순환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보면, 동요 역시 하나의 ‘사유의 지도’로 읽힌다. 출발은 ‘깨어남’이다. <반짝반짝 작은별>은 아이의 시선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노래다. 별을 향한 호기심과 시선은 곧 세계를 인식하는 첫걸음이다. 보는 순간, 세계는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어지는 <섬집아기>는 고요한 바다와 기다림의 정서를 담고 있다. 비어 있는 듯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감정은 더욱 깊어진다. 텅 빈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그리움과 생명의 숨결이 차 있다. <곰 세 마리>에 이르면 관계가 형성된다. 가족이라는 구조 속에서 ‘함께 있음’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연결의 장면이다. 그 다음은 흐름이다. <학교종>은 하루의 시작과 끝, 시간의 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