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구지천변 기행 14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하늘을 보면 흰 구름만 흘러가고
나는 어지러워 어지럼 뱅뱅
날아가는 고추 잠자리”
조용필의 노랫말이 문득 떠오른다. 1980년대 초, 뜨거운 여름을 식히던 노래다. 오늘도 그 더위가 한낮을 집어삼켰다. 저녁 어스름을 틈타 둑방길로 나섰다. 슬리퍼에 헐렁한 반바지, 마음도, 발길도 이따금 허술한 차림으로 밖으로 나도는 때가 있다.
몇 마장 떨어진 하늘 위, 고추잠자리들이 맴을 그린다. 그 날갯짓 따라 시선도 빙그르르 돌고, 그 맴도는 허공에 문득 반세기 전, 잠자리채 들고 들판을 뛰던 어린 소년이 깃든다. 그때의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쏜살처럼 흘렀다.
냇물 옆, 백로들이 고요를 깨운다. 천둥오리 무리 대신 찾아든 이 하얀 새들이 천변 풍경에 또 다른 운치를 드리운다. 그러나, 평소보다 좁아진 물길 폭은
왠지 내 안의 무언가를 바삭바삭 부서지게 만든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문명의 큰 그림자를 걸머진 성현들도 그 시간의 수레바퀴를 피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나라를 살리고, 또 어떤 이는 나라를 송두리째 삼켰다.그 모든 흐름은 결국, 한 마리의 산달팽이가 천만 년 전 대륙에서 상륙하여 지금 이 길섶을 느릿느릿 걷는 그 느림과 다르지 않다.
“시속 6미터의 속력으로 달팽이가 달리고 있다.
조금도 서두름 없이 전속으로 달리고 있다.”
………………….김제현, <달팽이>
달팽이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 길을 쉼 없이 나아간다. 우리도 그러하다. 잠자리를 따라 눈 돌리다 보면 구름도, 노을도, 마음도 조금씩 그 맴 속으로 젖어들며 어느덧, 또 하루의 시간이 바람속으로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