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를 연결하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저 고갯마루 위에 우뚝 선 비석 보이세요? 돈키: 영동고속도로 개통 기념비지. 백두대간의 기상처럼 서 있구나. 길 하나가 세상을 이렇게 바꾼다는 증거야. 호새: 수도권이랑 강원도가 확 가까워졌죠. 돈키: 그래. 길은 단순히 이어주는 게 아니야. 길이 열리면 삶이 움직이고, 줄기가 뻗으면 가지가 생기지. 호새: 예전엔 강원도 하면 ‘…이래요’ 방언에 옥수수, 감자부터 떠올랐는데요. 돈키: 이젠 관광, 레저, 힐링의 땅이지. 고랭지 채소는 식탁으로 오고 바다는 도시의 숨통이 됐어. 호새: 지인들 중에도 강원도에 농가나 세컨하우스 가진 분들 많아요. 돈키: 청춘 때는 막걸리 잔 들고 노래했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완행열차 타고 말이야. 호새: 고래사냥이요? 하하. 돈키: 그래. 그때는 다들 홍길동이었고 강원도는 율도국이었지. 호새: 그 청년들이 지금은요? 돈키: 중년 고개를 넘어 쉼터를 찾아 다시 강원도로 가지. 봄엔 꽃, 여름엔 바다, 가을엔 단풍, 겨울엔 눈. 사계절이 놀이터가 됐어. 호새: 강릉 단오제도 세계무형문화유산이잖아요. 돈키: 지구촌의 축제가 되었지. 평창
한강의 발원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선배님 집에서 마시는 물이 다 여기서 온다는 거죠? 오대산… 이름만으로도 기운이 납니다. 돈키: 그래. 정상 비로봉이 1,563미터지. 백두대간 줄기라 등산객들도 많이 올라오고. 두물머리에서 본 그 남한강 물줄기, 저기서 출발해 거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생각하면 참 묘해져. 호새: 오늘은 오히려 ‘시간을 잊자’고 나온 건데, 또 시간을 세고 계시네요? 돈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지. 잊으려 하면 더 또렷해진다. 자, 산자락 오르막이 시작이다. 저기 봐라. 소나무, 잣나무, 떡갈나무… 이름도 모를 풀꽃들이 눈길을 끄네. 손길이 덜 닿은 숲이라 그런지, 제멋대로인데도 조화롭지 않냐? 호새: 해발 800미터 산책길… 고요하네요. 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돈키: 인적도, 차량도 없으니 더 고요하지. 오래간만에 고독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다. 이럴 때 내 안의 ‘내’ 모습을 드러내. “왜 이 길을 걷고 있나?” 하고 묻거든. 호새: 다시 이 길을 걸 기회가 있을까… 그런 마음이죠? 돈키: 그렇지. 저기 자작나무를 봐. 매미가 허물 벗어놓은 듯 흰 몸통을 드러내고 줄지어 서 있구나. 풍욕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호
미지의 세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아직 새벽 다섯 신데 벌써 나서요? 돈키: 오늘은 대관령까지 20킬로야. 열 시에 고개에서 일행 만나려면 서둘러야지. 종자연구소 지나서 대관령 휴게소, 신재생에너지 전시관까지 들러야 하거든. 오늘이 마지막 일정이니 더더욱. 호새: 마지막… 그러고 보니 여행 끝이 보이네요. 돈키: 그래. 한동안 게으름에 빼앗긴 시간을 오늘에서야 되찾는 느낌이야. 이 아침고요엔 참 이상한 힘이 있어. 머릿속 잡념이 서늘하게 가라앉고, 오직 나만 또렷해지는 순간. 호새: 길이 점점 깊어지네요. 간판 보세요, ‘오대산 콘도’, ‘오대산 산장’… 돈키: 오대산 자락이란 증거지. 산이라는 건 가까울수록 이름이 더 많이 나타나는 법이야. 저기, 당나귀 목장도 보인다? ‘돈키호테 목장’이라니 웃기지 않나? 내 별명이 돈키호텐데 말이야. 호새: 왜 돈키호테예요? 풍차에 돌진하는 그 사람? 돈키: 열정이란 게 때론 엉뚱함과 붙어 다니는 법이거든. 한여름 뙤약볕에 도보 장정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 뭐, DNA 속에 그런 기질이 있는지도 모르지. <종자연구소 앞에서> 호새: 여기가 종자연구소군요. 고랭지연구소 지나니까 금세네요. 돈키: (앉으
메밀꽃-한우마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둔내에서 진부로 가려면 봉평 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긴 한데, 이번엔 6번 국도를 택했어. 그냥 상상으로만 들르고 가는 거지. 호새: 바로 안 가고요? 돈키: 돌아오는 길에 들르려고. 봉평이라는 이름만 봐도 마음이 먼저 움직여. 호새: 거기 이효석 작가의「메밀꽃 필 무렵」 배경이잖아요? 돈키: 그래. 허생원이랑 동이가 나오고, 물레방아 소리랑 시골 장터 냄새가 살아 있는 이야기지. 호새: 상상만 해도 분위기가 좋아요. 돈키: 여름에는 특히 메밀국수랑 메밀전병이 최고야. 더위에 달아오른 속을 부드럽게 눌러주지. 호새: 메밀 막걸리까지 곁들이면요? 돈키: 흐드러진 메밀꽃밭을 걷다가 한 사발 들이키면… 그게 바로 봉평 여행이야. 호새: 요즘은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잖아요. 돈키: 그렇다해도, 별빛 아래 물레방아 도는 풍경은 옛 이야기가 더 잘 어울려. LED 불빛 대신 초롱초롱한 별빛 말이야. 호새: 물소리, 산새소리 들으면서요. 돈키: 그리고 하얀 메밀꽃밭에 벌렁 눕는 거지. 그게 진짜 러브스토리야. 호새: 봉평에는 오일장도 서죠? 돈키: 그래, 재래장은 그냥 장이 아니라 이야기가 모이는 마당이야. 먹거리, 풍물
힐링 나들이 – 고양시 방문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한 해의 숨결이 가장 낮아지는 끝달, 나는 한수 이북의 땅, 고양(高陽)으로 길을 열었다. 새벽 일곱 시, 집을 나서 1호선 병점역에서 전철에 몸을 싣고, 종로3가에서 다시 3호선으로 환승하여 백석역에 내렸다. 발걸음은 옛 시장·군수협의회 정례모임이 열린 고양특례시 별관, 하늘과 가까운 스무 번째 층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대한 건물은 뜻밖에도 조용했다. 텅 빈 공간, 숨결마저 멈춘 듯한 정적. 1층에서 노인역량강화 일자리 프로그램이 진행돼 한 분 두 분 모여드는 등 굽은 어깨들 속에서 비로소, 건물 안에 온기가 차츰 돌았다. 스무 번째 층 회의장. 남녘을 바라보니 큰 유리창 밖에 한강이 흘렀다. 수천 년 세월을 감싸 안은 물빛이 아침 햇살을 받아 유유히 몸을 풀었다. 살아오며 헐떡이던 내 숨결도 그 강물 결 따라 잠시,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회의 전, 잠시 들은 이야기. 불연과 절연의 경계를 개척하며 친환경과 에너지 절감을 짊어진 한 기업인의 설명. 그 말들 사이로 이름 없는 산업전사들의 땀이 보였다. 작은 애국자의 고백처럼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기획정책관의 시정 보고가 이어질 때,
청산은 국력이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새벽이 아직 어둡구나. 4시 40분… 오늘은 진부면사무소까지 40.7킬로다.” 호새: “태기산으로 안 가고 청태산 자연휴양림 쪽으로 길을 택하신 거네요?” 돈키: “그래. 산은 높이로 오르는 게 아니라, 숨결로 걷는 거니까. 백두대간으로 이어진 이 강원도의 준령들… 물도 여기서 태어나고, 강도 여기서 비롯되지.” 호새: “도시에선 쉼터로만 보이지만, 여긴 근원이네요.” 돈키: “나무가 땔감이던 시절, 일제와 전쟁을 지나며 산은 거의 벌거숭이가 됐지. 그래도 봄만 오면 우리는 나무를 심었어. 초등학교 운동장, 마을 둑방, 집 울타리 옆…” 호새: “식목일 말이죠?” 돈키: “그래, 지금은 육림의 날이라 부르지만… 내 마음엔 여전히 식목일이 살아 있다. 오산시 소재 독산에 친구들과 심었던 잣나무가 이제는 하늘을 가리고 있어. 사람 발길도 늘었지. 나무가 나라를 다시 키운 셈이야.” 호새: “식목일이 다시 공휴일이 되면 좋겠네요.” 돈키: “솔 냄새가 난다.” 호새: “청태산 자연휴양림 … 여길 지나네요. 그리고 저 앞은 산림청이 운영한다는 숲체원이죠?” 돈키: “그래. 여긴 진짜 청산이지.” 호새: “문득 노래가 떠
청춘이여, 피어나라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휴게소에 닿았구나. 둔내… 오후 네 시. 늦은 점심 치곤 배가 너무 비어 있네.” 호새: “입술이 짜릿하지 않아요?” 돈키: “준비한 소금통을 잃어버렸지. 물만 들이켰더니 속이 밍밍해 세상 맛도 밋밋해졌어.” 호새: “그럼 뭘 드셨어요?” 돈키: “강된장으로 끓였다는 된장백반. 찬물에 밥을 말아 풋고추 하나 툭 얹고 된장을 찍어 입에 넣었지. 여름엔 말이다, 고추 하나가 보약이야. 오이 하나가 약이고.” (문이 열리며 헬멧을 든 청년이 들어온다.) 청년: “안녕하세요.” 돈키(속으로): “헬멧… 배낭… 깃발. 그래, 저 친구도 길 위의 사람이네.” 돈키: “동해 쪽으로 가나요?” 청년: “네. 강릉이요.” 돈키: “그래? 나도 그쪽인데.” 청년: “저는 파주에서 출발했어요. 강릉 들러 여기저기 더 돌아 볼려고요.” (잠시 머뭇거리다) “아저씨…걸어서… 대단하세요.” 돈키: “이 더위에 오토바이도 만만치 않을 텐데?” 청년: “힘들죠. 그래도… 가야 하잖아요.” 호새(속말): “둘은 묻지 않았지요. ‘왜 가느냐’는 질문을.” 돈키(속으로): “그래. 걷는 이유, 달리는 이유… 그건 각자의 가슴에만 있는 법이지.
안흥찐빵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아침 일곱 시… 눈이 먼저 나를 깨우더군. 오늘은 횡성에서 둔내사거리까지, 스물여섯 킬로미터 남짓. 라면 한 그릇으로 속을 달래고 배낭을 둘러맸지. 어제보단 짧은 길이라, 마음도 다소 느슨해졌고. 호새: 발걸음이 가벼웠겠네요? 돈키: 그래… 그때였다. “안흥”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더군. 그 밑에 더 크게 쓰여 있던 네 글자. …“안흥찐빵”. 호새: 그 이름 하나로도 군침이 도네요. 돈키: 소문이 맛을 만드는 법이야. 예전에 말이지, 침 맞으러 횡성에 왔다가 아내랑 함께 사 먹은 적이 있어. 그때 알았지. 찐빵도 ‘브랜드’가 되면 추억이 된다는 걸. 호새: 평창 한우, 여주 쌀, 금산 인삼… 이름만 불러도 고향 냄새가 나네요. 돈키: 그래. 충주 사과, 화성 햇살드리… 이제는 맛이 아니라 품격을 사는 시대지. 화성도 그래. 먹거리도 많고, 기업도 있고, 대학도 있고, 바다도 있고… 문화유산도 있는데, 이제는 흩어진 걸 하나로 엮어낼 때야. 호새: 그런데… ‘찐빵’이란 말, 어릴 땐 놀림이 되기도 했잖아요? 돈키: 그래. “앙꼬 없는 찐빵”이란 말로 헛속을 핀잔 주곤 했지. 그래도 말이다, 그 시절 우리한테 찐빵은… 케
산 아저씨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양평에서 횡성까지 여정이야. 용문면, 단월면, 청운면사무소를 거쳐 횡성까지… 56킬로, 140리 길이지. 호새: 하루 일정이 늦어졌네요? 돈키: 그래. 다시 양평군청에 도착한 게 새벽 다섯 시쯤이었어. 서둘러야 했지. 호새: 그래서 바로 걷기 시작한 거예요? 돈키: 네 구간으로 나눴어. 속도 조절하려고. 등산화 끈을 단단히 다시 묶고, 가슴 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15시간을 걸어야 하는 하루… 다짐 같은 거지. 호새: 경계를 넘어가는 길이었죠? 돈키: 그래.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구간. 호새: 주변 풍경은 어땠어요? 돈키: 산이었지. 온통 산.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 한 굽이 돌면 또 한 굽이, 전부 오르막이었지. 인내심이 없으면 못 버틴다. 호새: 물은요? 돈키: 채워 온 물이 바닥났어. 날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솔직히 난감했어. 호새: 차라도 세우지요… 돈키: 그럴 수가 없었지. 그래서 혹시 도움 될까 싶어 솔잎을 씹었다. 호새: 그때 물소리가 났던 거죠? 돈키: 그래. 계곡 아래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내려갔다 올까 말까… 한참 갈등했어. 호새: 그러다? 돈키: 패널 건물이 보였거든. ‘저기엔 물이
사유의 변곡점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새벽 6시인데 벌써 길을 나서요? 어제 막걸리 꽤 드신 것 같은데요? 돈키: 그게 오히려 숙면을 도왔나 봐. 오늘 목적지는 양평군청, 28km 남짓. 노문리 지나 명달계곡, 정배리, 신복리, 덕평리로 이어지는 여정이지. 새벽 산 기운이 차갑더라. 약수로 물병 채우고 한 걸음씩. 호새: 아침 산길 고요가 딱 그려져요. 돈키: 그래, 아스팔트 밟는 소리가 클래식 건반 치는 듯해. 햇살이 막 번질 무렵 명달계곡 입구에 닿았어. 식당 겸 슈퍼 하나 보이길래 아침밥 부탁드렸지. 감자국, 오이상치, 묵은지, 풋고추… 어머니 손맛 그대로야. 고추장에 보리밥 비벼 먹던 그 시절 딱 그 맛. 호새: 산마을에서 만난 어머니 밥상이라… 그거 자체가 여정의 보상 아닌가요? 돈키: 그러게. TV로는 탁구 경기가 한창이라 주인아저씨랑 나랑 눈으로만 ‘대한민국!’ 몇 번을 외쳤는지. 밥값 6천원 드리니 냉수병 다시 채워주시면서 정배리 가는 길도 알려주셨어. "해 뜨기 전 서둘러야 뜨거운 열기 피한다"고. 호새: 천리 길도 한 걸음이라던데, 지금까지 얼마나 걸으셨죠? 돈키: 집 떠난 지 250리쯤 걸었지. 발에 물집 좀 있을 뿐 별 문제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