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세월 담겼어라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 가슴속에 품었어라… 천년의 풍파, 세월 담겼어라.” 송창식이 부르던 그 경주불국사의 그림 말이야. 구름을 품고 안개를 토하던 토함산의 풍경이 딱 저 노래 한 자락이지. 호새: 저기 저 멀리 감포 앞바다… 문무왕 해저릉인가요? 돈키: 그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비문으로 남긴 왕이지. 학자들 말로는 신라는 백제나 고구려, 마한과는 계통이 다르다고도 해. 흉노계 북방 유목민이 바다 건너 남하하여 이곳에서 꽃 핀 나라로 기마도, 금장식, 화폐, 부장품들. 그 이동의 흔적들이 말해주는 이야기야. 호새: 역사는 대충 훑고 지나가면 안 되죠. 원효대사,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처용가도 빼놓으면 섭하지요. 호새: 경주거리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요. 원효대사의 “수허몰가부, 아소지천주”, 그 도끼 말이에요. 돈키: 7세기 중반, 원효대사의 ‘도끼송’ 이야기네. 그로 인해 ‘과부재가금지’법이 생겼다는 설도 있어. 두뇌회전이 빠르고 귀가 컸다는 태종무열왕이 과부였던 요석공주와 원효를 맺게 해서 이두문자를 다듬은 설총을 낳게 했다지. 호새: 신라는 935년에 사라졌으니 원효 이
영일만 친구야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오늘은 영일만 친구 만나러 간다. 호새: 바닷가 오두막 짓고 살던 그 어릴 적 친구요? 호미곶에서 일출 맞으면서요? 돈키: 아침해가 세상을 깨우는 법이지. 하지만 이번엔 그보다, 지구촌 밤바다를 밝히는 ‘등대지기’의 숨결이 모인 곳. 등대박물관부터 들러볼 참이다. 호새: 그럼 먼저 과메기 한사라 하고 둘러보죠? 돈키: 먹는 게 먼저냐? 배부르면 눕게 돼. 둘러보는 게 먼저지. 예의 차릴 때나 "Lady First" 하고, 싸움판에서는 먼저 선제공격이 흐름을 바꾸는 거야. 예전 6일 전쟁도 그랬어. 선방으로 승부가 갈렸거든. 호새: ‘먼저’가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네요. 선제 조건이 나머지 자원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전략인가요. 돈키: 그래. 하이테크가 시장에 진입하면 기존 기술은 바로 밀려난다. 기술 개발 경쟁이 치열한 이유야. 국가안보도 그 흐름 위에 서게 돼. 호새: 결국 미래전략적 사고와 기술력이 국력이겠네요. 돈키: 맞아. 미래를 내다보는 두뇌, 그리고 그걸 뒷받침할 경제력이지. 호새: 그럼 포스코나 포항공대가 바로 그 축이겠어요? 돈키: 그렇지. 이곳이 바로 그런 인재들을 길러내는 자리야. 호새: 포항제철 용
곶감 마라톤대회에 다녀오며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오늘은 어디로 가요? 또 달리나요? 돈키: 그래. 마라톤 삼총사와 상주로 간다네. 상주는 옛 통일신라 9주 5소경 중 하나였고,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활동하던 곳이지. 호새: 역사 깊은 도시였군요. 상주는 또 뭐가 유명하죠? 돈키: 곶감이지. “울던 아이도 달랜다”는 그 달고 말랑한 곶감. 설사와 감기에도 좋고, 피로회복에도 일품이야. 이왕 온 김에 곶감 한 박스는 챙겨야지. 호새: 운동장은 어땠어요? 돈키: 늦게 도착했더니 전마협 사람들이 무대 세우고 텐트 치느라 분주했다네. 그리고 말이야… 조명탑 뒤로 뜬 달이 참 크더군. 고향 뒷동산에서 달맞이하던 느낌이었어. 호새: 그 밤, 좋았겠다… 돈키: 다음날 아침, 출발 지점은 벌써 북적대고 7천 명이 모였으니 주차가 더 힘들더라. 몸풀기는 황영조 선수 따라 하고, 사회자 신호에 따라 풀·하프·10km·5km 4족 로봇까지 함께 출발하니 장관이었지. 호새: 로봇도 뛰었어요? 세상이 참 빨라졌네요. 돈키: 점심 후 자전거박물관도 들렀지. 그곳에 송선생의 해설이 아주 인상적이었어. “문명은 문자와 바퀴가 바꾼 것이다.” 250년 자전거의 발달사와 그 속에
들국화 여인– 황구지천변 기행17 시인 / 영화감독 우호태 주말 아침, 천변 산책에 나섰다. 며칠 전 평생지기가 거실에 들여놓은 들국화 향기가 아직 코끝에 남아있다. 눈을 돌리니, 천변 비탈에도 노란 들국화가 올망졸망 무리지어 피어 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들판에 나가 데이지 꽃을 더 많이 꺾어보리라.” 시인 나딘 스테어가 85세에 남겼다는 그 구절이 떠올라, 손끝으로 한 가지를 조심스레 꺾는다. 노란 꽃잎에서 진한 가을 향기가 피어난다. 이승을 떠난 가수 현철이 상사병의 처방전처럼 부르던 노래, <들국화 여인>의 그 고운 빛깔이 이렇지 싶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가을을 남기고 서늘한 바람 속으로 사라질 꽃, 들국화다. 천변 오른편 안녕뜰은 이미 추수를 끝내 텅 비었다. 한때 푸르게 물결치던 이곳도 누렇게 익은 끝에 마음을 비워내니, 자연의 섭리요 생명의 순환이다. 어제, <화성 동서남북 문화기행> 영상과 웹툰 마무리를 위해 원로 문인을 찾아 들렀던 충남 당진의 풍경과는 사뭇 달라, 잠시 고개가 갸웃해진다. 왼편 물길 한가운데 모래톱 위에는 가마우지와 청둥오리들이 앉아 제 몸단장에 열심이다. 제 자리에 제 있음에 눈인
봄의 교향악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대구에 가면 누가 안내를 해주나요? 돈키: 옛말에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했지. 대구는 큰 언덕, 달구벌이라 비빌 자리도 많아. 어제 전화했더니 군 동기가 흔쾌히 도와준다더군. – 휘릭 이박사: 합천에 다녀왔으니 이번엔 천천히 가보세. 계산성당, 청라언덕, 제일교회, 근대로, 김광석 거리, 그리고 팔공산까지. – 휘릭 이박사: 가야산에서 조금 지체했지. 날 어두워지기 전에 다 갈 수 있을까 모르겠네. 여기가 135년 역사의 계산성당일세. 저 건너편이 청라언덕. 계산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볼 수 있는 귀한 건물이지.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네. 탑이 쌍탑인데, 저기 보이는 경북 최초 개신교 교회인 제일교회도 쌍탑이야. 돈키: 큰 언덕 위에 쌍탑이라… 섬김의 짝이 되는 모습 같네. 한 손으로는 교만이 되기 쉽지. 두 손이 모여야 섬김이 되고, 섬김이 만남을 이루고, 만남이 곧 사랑이 아닌가. 사랑이 깊어지면 두 팔 벌려 서로를 포옹하잖아. “편편황조 자웅상의”라, 세상도 서로 어울려야 아름답지. 호새: 여기가 청라언덕이군요. 라인강을 내려다보는 로렐라이 언덕이나, 예술혼이 불타는 몽마르트 언덕
산정불심(山靜佛心)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협천이라 하지 않고 합천이라 하네요? 황강이 합천을 가르며 낙동강에 합류한다면요? 돈키: 세 지역이 합쳐진 고장이라 하기도 하고, 한자음을 가차(假借)한 이름이라 보기도 해. 가야·백제·신라가 서로 교류하고, 때로는 싸우며 강을 따라 바다 건너 왜까지 이어진 길목이지. 특히 5~7세기 신라의 융성과 가야의 쇠락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 무대야. 호새: 고대의 왕들도 요즘 통치자들처럼 강이나 바다를 건너 큰일을 벌였던 모양이에요. –휘릭 호새: 장경각에 뭔 경판이 저리 많대요? 돈키: 오다가 관리소에서 들었는데, 가야산의 만물상이 유명하대. 세상은 군상이 모여 사는 곳이니 그릇 크기에 따라 법문도 많아지는 법이지. 부처님의 팔만 법문을 새긴 곳이라 생각해봐. 호새: 홍보실장이 여기가 한국 화엄종의 ‘1번지’라던데, 그 뜻을 헤아리다 보면 한세상 다 저물겠어요. 돈키: 어찌 자성의 깨달음에 그리 많은 법어가 필요하겠느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처럼, 마음자리에 다다르면 내가 곧 부처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 등불 삼아 진리의 길을 비추라는 뜻일 게야. 크고 넓은 시공을 초월한 깨달음, 그
정신문화의 수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정신문화의 수도”라 불리는 안동인가요? 돈키: 그렇지. 어떻게 영남학파의 본향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게. 이 고장엔 안향, 우탁, 이제현, 김계행, 그리고 퇴계 이황 선생까지… 성리학의 물줄기가 깊고 넓게 흐르지. 호새: 학문뿐 아니라 사람 이야기도 많을 것 같아요. 주먹왕 김두한도 안동김씨라고 하던데요? 돈키: 하하, 그럴 수도 있지. 안동은 이름난 집안이 많거든. 안동댐, 역동서원, 묵계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하회마을, 학봉고택… 하루 이틀로는 다 둘러보기 어렵다네. 호새: 유림의 본산이라면 예절도 엄격하겠어요. 그럼 오늘은 안동소주 대신 안동찜닭은 포기인가요? 돈키: 그럴 리가. 오늘은 안동간고등어 조림 밥상을 차릴 거야. 짠한 사랑가가 들려오는 월영교도 돌아볼 거고. 호새: 우탁 선생 제향이 매년 열린다던데, 역동서원 이름은 왜 ‘역동’인가요? 돈키: 우탁 선생이 ‘역’을 깊이 공부하고, 이 땅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야. 고려 후기의 대학자지. ‘지부상소’로 올곧은 뜻을 밝힌 분이고, ‘탄로가’와 여러 한시가 전해오지. 퇴계 선생께서 서원에 사액을 청하고, 직접 현판을 쓰셨다네. 정신적 사부로 모
솔바람 소리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주변에도 소나무 숲이 많은데, 굳이 그 먼 울진까지 가야 하나요? 돈키: 거긴 금강송 군락지잖아. 제대로 된 소나무의 품격을 볼 수 있을 거야. 태백산에 같이 갔던 일행도 함께 간다네. 돈키: “숨쉬는 땅, 여유의 바다” 울진이라… 이제 사람만 있으면 완벽하겠네. 농장맨: 태백산도 좋았는데, 이번 금강송단지 원행도 기대됩니다. 게스트: 이름부터 범상치 않네요. ‘금강송’이라니… 휘릭― 해설사: 국민 10명 중 6~7명은 소나무를 가장 좋아한답니다. 우리 삶 속에 늘 가까이 있어 마음이 편안한 나무죠. 리틀맨: 그래서 그런가요, 굽은 소나무도 선산을 지킨다잖아요. 농장맨: 정이품송은 임금에게 절도 올렸다던데요. 해설사: 맞아요. 또 유배지에서 이상적에게 완당 선생이 건넨 <세한도>의 주인공도 소나무죠. 혹독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으니, 참 우리 민족의 기상과 닮았습니다. 돈키: 근데 ‘금강송’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을까요? 해설사: 일본 학자가 붙인 이름이에요. 원래는 ‘적송’인데, 울진·봉화에서 금강산까지 이어진 소나무를 묶어 ‘금강송’이라 부른 거죠. 햇볕을 좋아하는 양수라서 참나무랑은 잘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호새: 고개 하나 넘으면 영남지방인가요? 돈키: 그래.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 사이, 바로 그 유명한 문경새재야. 새도 날아 넘기 힘들다 해서 ‘조령(鳥嶺)’, ‘새재’라 부르지. 하지만 그 고개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 높던 길이기도 했어. 호새: 문경이라면 반가운 이름이네요. 무슨 이야기가 들리나요? 돈키: 요즘이야 벚꽃은 북상하고 단풍은 남하하지만, 조선시대엔 장원급제 소식이 이 고개를 넘어 들려왔겠지. 이름 그대로 ‘문이 열린 고을’, 문경(聞慶)이라 하지 않았을까?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을거야. 옛적 토함산에서 피리 불며 신라의 영화(榮華)를 그리던 풍류객에다, 쇳물 끓여 철갑선을 만들었을 포항, ‘울산 큰 애기’ 미소를 띠며 자동차를 큰 배에 싣고 세계로 뻗어가는 울산도 있잖아. 호새: 안동, 경주, 포항, 김해… 영남의 길이네요? 돈키: 그렇지. 흥망의 역사가 고갯마루에 서려 있지. 통일신라 시절엔 도성 경주와 부도(副都) 충주를 잇는 길, 고려 때는 개성과 안동을 잇던 피난의 길, 조선시대엔 한성과 영남을 잇는 대로였어. 경부선, 고속도로가 생기며 옛 이야기가 되어가지만, 그 숨결은 아직 남아 있지. 호새: 천등산
울렁울렁 처녀가슴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 바다를 건너요. 뱃머리도 신이 나서 트위스트를 추고, 울릉도는 정말 아름답네요. 아가씨들 고운 얼굴, 달달한 호박엿 냄새,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말, 괜히 나왔겠어요? 오징어 풍년이면 시집간다던 그 노래처럼, 트위스트 한 곡 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돈키: 바닷바람 참 시원하다. 울릉도 트위스트, 뱃전에 나부끼면 더 신나겠는걸. 호새: 울릉도 아가씨한테 눈 팔 생각 말고, 저기 뱃머리에 서봐요. 오늘은 ‘돈키호태와 호새’가 아니라 ‘잭과 로즈’ 같잖아요. 눈 감고, 제 등에 올라서 봐요. 어때요? 돈키: 와– 바다가 끝이 없네! 호새: 이거 뭐예요, 장단은 맞춰야죠. 돈키: 쏘리 쏘리~ 그냥 해본 말이야. 울릉도 마라톤대회 다녀오고 오랜만에 다시 온 거라서 그래. 호새: 혼자 뛴 거예요? 돈키: 아니, ‘마라톤 삼총사’ 동창들이랑 같이 뛰었지. 호새: 그래도 뭔가 사연 있어 보이네요? 돈키: 있지. 왼쪽 눈 찡긋하면, 항구에 사는 아주머니가 달덩이처럼 웃으며 살이 통통한 놈으로 회를 썰어주시거든. 그 맛이란, 둘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 정도야. 게다가 울릉살이 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