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패션쇼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이곳저곳에서 가을빛 축제가 한창이다. 달리기, 노래자랑, 영화제, 문화제…. 지자체마다 행사가 열려 연휴의 눈소풍을 이룬다. 수원·화성 일대는 물론 서울, 옛 한양에서도 시가를 따라 능행차 대열이 시민들의 눈과 발길을 붙든다.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능행차를 오늘에 재현한 행렬이다. 한양 도성에서 화성까지 이어지는 100리 원행은 구간마다 지자체별 문화행사와 어우러져 가족 나들이의 볼거리가 된다. 무엇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 나선 길이니 효의 상징으로도 각별하다. 100리 길의 땅울림이다. 만장이 휘날리고, 형형색색의 제복이 빛난다. 갈빛 가을에 어울린 음악대가 행진하고, 문무백관의 행렬이 갈바람을 가르며 나아간다. 문득 궁금해진다. 어떤 보폭으로 걸었을까? 행렬의 대열은 어떻게 맞췄을까? 무슨 음악을 울렸을까? 집 앞 도로를 지나가는 행렬을 보며 평생지기와 함께 집을 나섰다. 며칠 전 한가위에 부모님 묘소를 찾으며 받았던 가을 햇살을 떠올리며 길가에 늘어선 구경꾼들 사이에 섰다. 옛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무술 시연, 건장한 갈색 말, 행진대열을 이루기 위해 제옷을 갖춰 입는 사람들…. 곳곳에 봉사단이 문화제 행사를 알린다
지도자의 역량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개천절을 연원으로 나라의 흥망성쇠를 살피니, 지도자와 참모, 관료와 지성인의 역할이 중요한 요소다. 새삼스러운 것도 없으나, 이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나라도 잃고 국토와 백성은 피폐해진다. 종국에는 시대의 전환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진짜 역할은 무엇일까? 결국 당대에 필요한 에너지를 찾아내어 국가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능력이라 볼 수 있겠다. 그 역할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국가건설에 이어 산업화 시대를 관통했던 질문이다. 이제는 조금 다른 질문이 놓여 있다. “AI 시대에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인간의 가치로 남길 것인가?” 아직은 조금 이른 질문일지 모르나, 이미 우리 앞에 놓인 시대의 과제인 게다. 축약하면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방향은 국가건설 → 산업화 → 민주화 → 세계화 → 정보화 → 문화화 → AI화로 압축할 수 있겠다. 이를 하나의 관점으로 공식화하면, 국력(국가의 힘) = 사람의 에너지 × 제도의 에너지 × 기술의 에너지 × 문화의 에너지 × 외교 에너지다. 지금은 AI가 산업·정보·문화의 에너지를 다시 결합하며 새로운 국가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전환기라 볼 수 있
단기 4359년 개천절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오늘은 5대 국경일 가운데 하나인 개천절이다.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뜻을 품은 개천절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워 우리 역사에 첫 국가의 문을 열었다는 전승을 기리는 날이다. 서기 2026년에 2333년을 더한 단기 4359년. 반만년 역사로 이어지는 우리 겨레의 깊은 샘인 게다. 오늘에 이른 긴 역사의 뿌리인 게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옛 기록에 전해지는 단군과 고조선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이어온 역사 인식의 한 줄기다. 한글날은 나라말을 기리고, 삼일절은 나라를 잃었던 아픔과 독립의 뜻을 되새기며, 광복절은 되찾은 나라의 기쁨을, 제헌절은 헌법과 법치의 의미를 새긴다. 그 바탕의 먼 연원을 생각하면 개천절은 우리 역사의 출발을 돌아보는 날이라 하겠다. 베란다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한참 바라본다. 건·곤·감·리의 네 괘가 홍색과 청색의 태극을 감싸고 있다. 태극은 높고 낮음, 오르고 내림이 서로 어우러져 끊임없이 순환한다. 뜻을 하나하나 알지 못하더라도, 어린 시절부터 오늘까지 수없이 바라본 태극기는 어느새 내 삶의 풍경이 되었다. 문득 민들레 홀씨가 떠오른다. 아득
문풍지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문풍지는 문이나 창문의 틈새를 막아 찬바람과 소음, 먼지와 벌레를 막아주는 생활용품이다. 참으로 정감 어린 이름이다. 현대의 아파트 생활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에는 겨울을 맞는 집안일 가운데 하나였다. 여름이면 헐렁한 문틈으로 바람이 드나들어 시원하게 통풍되던 문이었다. 겨울이 오면 달랐다. 찬바람이 문틈을 파고들고 문풍지가 바람에 떨며 운다. 팽팽팽— 한밤의 적막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다. 바람의 세기가 가늠될 만큼 소리가 커지면 절로 이불을 머리맡까지 끌어당겼다. 새삼 문풍지를 떠올리는 것은 그 소리에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풍지의 울음은 여인의 한 맺힌 설움 같기도 하고, 사나이가 삼킨 울분을 토해내는 깊은 떨림 같기도 했다. 요즘에는 옛스러운 풍경을 꾸민 음식점이나 박물관 전시에서나 간혹 만난다. 그럴 때면 반갑다. 수숫대며 벼며 콩이며 고구마며 해바라기와 고추가 창밖 가을빛과 어우러진다. 냇둑에 스멀스멀 피어나던 옛 고향집의 풍경이 유리창 너머에 펼쳐지는 듯하다. 팽팽팽— 고속으로 돌아가는 세상살이에서 잠시 걸음을 늦추는 한마당의 쉼이다. 떠오른 추억은 정서적 위무가 되고, 세찬 바람이 한숨
내 나라 군인, 국군의 날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내 나라, 대한민국이다. 나라 앞에 ‘내’가 붙었다. 내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밝히고, 제2조는 대한민국 국민의 요건을 규정한다. 그리고 제3조는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 대한민국의 영토를 명시한다. 오늘은 제78주년 국군의 날이다. 내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이 땅을 지키는 내 나라의 군대, 대한민국 국군을 생각하는 날이다. 나라의 말은 국어이고, 우리의 글은 한글이다. 나라의 노래는 애국가이고, 나라의 상징에는 태극기와 무궁화가 있다. 한복 또한 오랜 세월 우리 삶과 함께해 온 고유한 옷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꼬레아’는 ‘코리아’가 되어 지구촌 곳곳에 이름을 알리고, 이제는 K라는 이름으로 문화와 산업이 세계와 만나고 있다. 참으로 국내외가 시끌시끌한 세상이다. 그만큼 역동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앞둔 혼돈일까? 문득 반만년 역사를 휘릭휘릭 되짚어 본다.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군의 역할이 제대로 서지 못했던 때에는 사회의 혼란이 뒤따랐고, 끝내 나라를 잃어 백성들이 유민이 되어 떠돌기도 했다. 국군의 기강과 위용은 국민의 사기
서늘한 바람소리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서늘한 바람소리로 아침과 저녁을 맞는다. 참 오래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서늘함이다. 철이 들어서일까? 초교 시절,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성적표를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더위를 식히는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성적표에는 수, 수, 수보다 어려운 집안살림이 적혀 있었다. 집에 보탬이 되려 서너 마리 양을 끌고 집에 들어서면 아버지의 두툼한 손길이 뺨에 선연했다. 여름날에 만난 서늘함이었다. 찰나의 기억 하나가 한낮의 들판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떠오른다. 그때 나는 물리적인 세계와 의식의 경계가 어딘가에서 맞닿는 순간을 경험했는지도 모르겠다. 들판을 마주하고 서늘한 바람소리를 듣는다. 어린 날의 촉감은 저편으로 물러가고 오늘의 서늘함은 삶의 무게를 깨우는 회초리가 된다. 가을이면 으레 찾아오는 바람인데 늘어가는 나이테 때문일까. 저만치, 아니 그 옛날 한참 앞서 걸어간 발자국의 주인공들도 이런 바람을 맞았을까? 품으로 달려드는 오롯한 서늘함이 한낮에 늘어진 기운을 깨운다. 산야를 훑는 눈길에도 서늘함이 스민다. 숱하게 내뱉은 거친 입말들이 서늘한 바람소리에 허리가 잘린다. 말보다 침묵이
이름을 쓰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매일 산문 일기를 쓰며 내 이름을 쓴다. 눈으로 보고 쓰기는 하지만 입으로 내 이름을 불러 본 지는 꽤 오래되었다. 까까머리 시절, 선생님이 불러주던 내 이름. 그 후로 언제였던가. 학번, 군번, 직급, 직위…… 숫자와 직함이 이름을 대신했다. 어쩌다 이름이 불리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불현듯 내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다. 어떨까? 산자락에 가 닿을까? 흐르는 냇물에 닿아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까? 이리 내 안에 든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보는 날이 왠지 기쁘다. “○○야, 놀자.” 어린 시절 어깨동무하고 뛰놀던 동창들이 불러주던 이름이다.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걸어가도 좋으련만, 누군가는 로켓을 타고 일찍 우주행성으로 떠난 듯 먼 길을 먼저 가버렸다. 가고 없음에 그 이름을 떠올리면 얼굴이 먼저 그리운 계절이다. 침을 발라 공책에 꾹꾹 눌러 쓰던 내 이름. 이름에는 지나온 과거가 있고, 머물고 있는 현재가 있고, 다가올 미래가 있다. 쓰면 시간을 품은 이름이고, 부르면 지금 여기에 머무는 나의 이름이다. 올가을 산마루에 올라 내 이름을 크게 불러봐야겠다. 산메아리라도 그 이름을 다시 듣고 싶다. 나는 지금
원형이정(元亨利貞)-천변기행66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한가위 내내 이어진 열흘간의 분주함이 휘리릭 지나갔다. 벌초하고, 차례를 지내고, 지인의 안부를 묻고, 친지를 찾아뵙고…. 달력의 붉은 글씨도 어느새 다시 검은 글씨로 돌아왔다. 귀가해 하룻밤을 보내고 천변 산책길에 나섰다. 들판이 누렇게 익어 있다. 곧 본격적인 추수가 시작될 모양이다. 가을 탓일까? 문득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이라는 천자문의 첫 구절이 떠오른다. 어릴 적부터 한자를 가까이한 탓인지 천문과 지리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따금 동양사상의 언저리를 맴돌곤 한다. 동서양의 고전을 찾아 읽으며 사유의 기쁨을 맛보지만, 아직 하나의 체계로 꿰어내지는 못한다. 어쩌면 삶이란 그렇게 숲속을 헤매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태어나 만물에 호기심을 품는다. 호기심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배움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자신의 길에 들어선다. 도(道)는 우주의 질서라 한다. 그 질서를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일 것이다. 어릴 적 까까머리 시절에는 그저 교훈쯤으로 여겼던 성실(誠實)도 살아갈수록 온몸으로 끌어안아야 할 삶의 자세임을 알아간다. 주역은 변화의 이치를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