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6 (금)

오피니언

<한반도소나타139>-해설1

도보의 미학 혹은 삶의 원형을 찾아... 홍신선-(전)동국대 국문과교수


도보의 미학 혹은 삶의 원형을 찾아
홍신선-(전)동국대 국문과교수

왜 길인가. 그리고 왜 걷는가. 길은 인간 정신이 그동안 걸었고 또 걸어 가야할 지남( 指南)인가. 이번 우호태 시인의 화성에서 강릉까지의 한반도 횡단기, 화성소나타4권인 <한반도횡단소나타>를 읽으며 나는 이런 물음을 앞에 했다. 이 횡단기의 길은 실제 현실공간에 놓여 있는 구체적인 노정인데 말이다.
우 시인은 뜨거운 한 여름 그 공간을 일정 계획하에 도보이동을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내면에서 걷는 정신의 길과는 일단 달라 보인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실 가운데 놓인 결과 정신의 길은 결코 다르지 않다. 그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고 또 그걸 확인하는 일- 그 일이 이번 <한반도횡단소나타>를 읽는 내 나름의 독법이 될 터이다. (단락1의 머리말)

-휘리릭-

(단락3의 마무리)
“자신의 길을 가야합니다. 산넘고 물건너 체험을 통하여 얻은 값진 깨달음입니다. 정제 되지 않은 사고와 행동은 무질서를 만들어 갑니다. 온전한 나를 이루어야 깨달을 수 있고 타인도 사랑할 수 있음을 체험한 도보 여정입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간 선인들 발자취가 선연합니다.” —--맺는말 부분

인용한 글은 이번 한반도 횡단을 결행한 ‘서해에서 동해까지’의 도보여행을 결산하고 있다. 그 결산에 따르자면 인간은 ‘온전한 나’를 이루어야 하고 그 온전한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고 한다. 그러면 온전한 나란 어떤 존재인가. 통념 그대로 인문적 소양과합리적 덕성을 두루 갖춘 인간상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그 같은 소양과 합리적 덕성을 두루 갖춘 인간상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그 같은 소양과 덕성을 실제 현실적 삶에 구현시키는 길-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길을 간다는 의미로 나에게는 읽힌다. 여기서 우리는 우시인의 도보여행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매일 4,50리 길을 걸으며 그는 자신만의 시간을 전유한 가운데 자신만의 웅숭깊은 사색을 해나간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길은 과거처럼 인간과 물류의 단순 통로만은 아니다. 그 길은 선현들이 지켜나간 정신궤적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길 위에서의 걷기란 일상을 벗어나 자기 자신은 물론 숱한 경물을 만나 대화하고 심미적 향유를 하는 행위 그 자체라 할 것이다. 그렇다. 이번 우시인의 도보여행은 이러한 길의 복합적인 의미를 거듭 확인 시켜준 듯 깊은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나는 우시인의 화성소나타(1-4), 전편을 통독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학의 한 갈래로서의 기행수필을 다시 생각했다. 낯선 세계의 문물을 알리는 단순 여행기든 민족혼 탐구의 일환이었던 일제강점기 초의 이념형 답사기든 우리 문학사에는 다양한 기행수필 작품들이 있어왔다. 그 작품들은 나름의 갈래적 특장들을 지닌다. <한반도횡단소나타> 역시 나름의 갈래적 특장을 보여준다. 그 하나는 지역사회와 거기서 영위된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기행문 도처에서 이 애정은 축축하게 배어나온다. 우리가 그의 글을 읽으며 맛보는 따뜻한 울림은 다름 아닌 이 애정에 기인한 것일 터이다.

다음으로 그의 기행수필의 스타일/문제를 지적해야 하 것이다. 대체로 그의 문장은 단문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 단문형식은 글에 일정한 속도감을 제공한다. 이 속도감은 단문도 단문이지만 저 특유의 입말과 간결 명료한 조사에 기대어 얻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우시인 기행수필의 남다른 특장은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연작수필 <횡단소나타>에 보다 인상 깊게 접근토록 해줄터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우 시인의 성공적인 한반도횡단을 축하하자.

(*해설내용 1-3의 단락 중, 1의 머리부분과 3의 맺음 부분만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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