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얻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버스가 성삼재까지 오르나요?
구례맨: 동절기엔 운행이 제한됩니다. 저 아래 섬진강을 먼저 둘러보시고, 새벽녘에 날쌘돌이 타고 성삼재로 오르셔야지요. 그 길로 노고단까지 닿을 겁니다. –휘릭
실버맨: 오늘이 구례 장날이라 잠시 들렀다 가렵니다.
돈키: 노고단까지 왕복 두어 시간이면 족하겠네요. 산악 마라톤하듯 다녀오지요. –휘릭
파주맨1: 새벽 두 시에 출발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운해를 보니 참, 선계에 들어선 듯합니다.
돈키: 서둘러 오느라 경관을 놓칠 뻔했는데, 이 풍광은 그림 속에서나 보던 세계군요. 선계에 오른 기념으로 한 컷 부탁드립니다.
파주맨2: 하산길 눈길 조심하십시오.
돈키: 찰칵—사진 한 장 감사히 받지요. 보답으로 파주 가면 한잔 올리리다. –휘릭
호새: 처음 보는 분들인데도 산 위에서는 다들 벗이 되는군요.
돈키: 지리산은 큰 산이지. 큰 산엔 선인(善人)들이 모인다 했어. 옛말에 ‘적선지가에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하였지. 구름 위 산정에 오르니 우리도 선인(仙人)의 무리에 든 셈이야.
호새: 참 좋은 날입니다. 약속 시각에 닿으려면 또 뛰어야겠네요. 황구지천 둑방길에서도, 여기서도 늘 뛰네요.
돈키: 때로는 걷고, 때로는 뛰고, 또 쉬어가야지. 지리산이란 이름도 ‘지혜의 산(智異山)’이란 뜻이 있다더군. 세상 이치를 품은 산이라네.
호새: 그래서 명산이군요.
돈키: 그렇지. 큰 산에서 큰 뜻이 나오지. 저잣거리의 소음으로 얻기 어려운 말씀이야.
호새: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품은 삼도봉이라더니, 그 품이 깊어 섬진강을 낳았군요.
돈키: 그 섬진강 물결 속엔 매천 황현 선생의 의분이 흐르고, 제봉 고경명 장군과 녹천의 절의도 깃들어 있지. 그래서일까, 그 눈물 위에 봄이면 매화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네. 그 길 따라 발길이 모이고, 어떤 이는 섬진강 텃밭에 호미를 놓고 사랑을 심는다지.
호새: 두꺼비 소리는 안들리려나요?
돈키: 왜군이 쳐들어올 때 울어 경고했다지. 그래서 ‘섬진(蟾津)’이라 부른다더군.
호새: 섬진강은 두꺼비, 백마강은 말… 다 이름에 전설이 있네요.
돈키: 허울뿐인 이름보다 마음의 선함이 오래가네. 심청이의 효심이 그러했고, 춘향의 절개도 그러했지.
호새: 실버맨이 그러시더군요. 경찰서 가는 길에 재첩수제비가 별미랍니다.
돈키: 시간이 허락할까?
호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하지 않습니까. 나중엔 색시 손잡고 섬진강 매화길을 걸어보려구요.
돈키: 그럼 나도 다시 와봐야겠네. 그땐 지리산 종주까지 해보리라.
호새: 강자락 따라 내려가다 보니 ‘화개장터’ 노래가 절로 떠오르네요. 어릴 적 화투 그림 그리다 혼났다는 그 가수 양반, 젊은 날에 ‘딜라일라’ 부르며 세상을 흔들었다던데요.
돈키: 허허, 그 양반 ‘선구자’ 부르며 해란강을 노래했지.
호새: 해란강엔 일송정이 서 있고, 섬진강엔 매화가 피니, 하나는 절개요 하나는 사랑이네요. 위아래 고을이 모여 한마당 장터를 이룬다지요.
돈키: 그럼 탁배기 두어 사발 마시고 꽹과리 한번 올려야 겠네.
호새: 아따,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꽃 본 듯이 봐주시요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