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구지천 기행9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어느 소설속에 등장하는 부부의 대화내용이다. “여보, 의사선생이 뭐라고 말씀하셔”. “응, 안정을 취하면 곧 나아진대”. “그래, 이즘 당신 너무 직장일로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럴거야”.
안정,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지면 몸이 알아서 눕는다. 고속으로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것은 그에 못지 않은 멈추게 할 수 있는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이다. 거의 반년간 몸고장으로 시달리고 벌여 놓은 일처리를 위해 쉼없이 비탈길에 몸을 굴린 탓에 몸이 쳐지고 말도 어눌해진다 싶다.
저녁나절 천변길에 나섰다.물가 채 푸르른 풀섶에 눈이 시원해 맘도 차분해진다. 곁에 걷는 평생지기에게 누런 낙옆과 푸른 잎새 중 어느 것에 맘이 편해져 물으니 “난 푸른 잎이 좋아” 답을 한다. “우린 집밖에 정서안정제가 지천이니 이곳이 낙원인거네” 응대하니, “그럼, 집안에 나는 상비 안정제네?”. 때를 맞췄을까? 겉치레 말보단 해질녘 천변가 하루살이들이의 생존전략의 군무가 시야를 가려 “어휴어휴” 손을 내저으니 말이다.
노을지는 텅빈 논배미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콤바인에게 밑둥이 잘린 벼포기 자리에 따뜻한 날씨 탓에 푸른 잎이 한뼘이나 솟아나 있어 수년내로 남방처럼 이모작이 가능할까도 싶다. 어린 모가 심겨진 봄날 가지런한 논들의 정경이 싱싱한 맘을 돋웠다면 밑둥이 잘린 텅빈 논자락 모습에서는 <만종>의 고요한 애상이려.
바닥에 흐트린 검불위에 서성이며 주위 풍경을 배경으로 상비안정제 가을여인을 폰에 담았다. 그리 울어대던 풀벌레소리도 조용하다. 고랑도 말라있다. 통통해야할 배추포기는 속이 차지않아 올 배추값은 날개를 달것 같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새 낙엽되고”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는” 안녕뜰에 가을이 깊어간다.
봄날 푸르른 들판처럼 가을날 텅빈 들판도 정서 안정제인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