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냉이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지역 후배가 주말에 농장에서 김장한다며 들르란다.
정성스레 가꾼 배추를 절이고, 씻고, 속을 만들어 켠켠이 넣어 싼 김장통을 건네줄 모양이다. 씨 뿌려 결구까지 들인 정성이 큰 것을 알기에 여간 큰 맘이 아닌게다.
주말 선약으로 사전 일손이라도 보탤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도중 주변의 불타는 가을산에 눈이 붙들리고 FM라디오 음악방송에 귀가 붙들려 네바퀴도 천천히 구른다. 동탄 장지리를 벗어나 안성방향 도로에 올라 달려가는데 어찌된건지 유턴하란다. 나사가 풀린 요즘 세상처럼 네비게이션이 말썽을 일으켜 가는 길을 헤매다 정오에야 도착했다.
때 맞춘 점심에 눈 인사로 악수를 대신한 채, 손품은 팔지 않고 맛난 비빔국수에 입품만 열심히 팔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이리 맛나니 서민봉사로 비빔국수집은 어떠냐며 우스개 소리도 좌중에 비볐다. 가을들녘에서 참 맛있는 비빔국수다. 비빔밥, 비빔국수, …. 그래, 비벼야지. 해야 맛도 나고 세상도 돌아가니 말이다. 하늘보고 두 손을 비벼볼까? 비나이다 비나이다. 0000님께 비나이다. 오늘은 이 세상이 제대로 돌게 하옵소서!
“비빔국수가 맛있다”, “배추 결구가 실하다”는 등 입품을 다팔아 머물면 일손만 더디게 할 듯 해, ‘금배추’와 ‘알통무’를 싣고 떠나려던 참에 배추밭 골사이에 지천인 가을냉이가 눈에 든다. 일손이 달리는 가을철이라 “딸이 아홉이라야 맛 볼 수 있다”는 가을냉이”가 아닌가! 이미 쪽을 팔았겠다. 봄날, 들녘 쪼그린 누이 처럼 비닐봉지를 들고 밭고랑에 쭈구려 앉았다.
흙을 들춰가며 제법 시간여가 흘렀다. 고개들어 산세를 바라보니 그리 위세를 떨던 퍼렇던 잎새가 불에 탄다. 제몸 태워 세상사람에게 고별 인사를 하나보다. 만산홍엽, 보는 이들의 가슴이 환하다!
대자연의 전음이다. 넌 왜 가을냉이가 되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