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리와 문턱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두 달여만에 경기도청, 의회, 교육청을 방문했다.
매번 주차하느라 주차장을 서너바퀴 돌아야하는 번거로움에 걸어들었다. 현관과 지하층을 두어번을 왔다갔다 게걸음 후에 마침내 엘리베이터에 승차해 10층 방문장소에 도착했다. 빌딩만큼이나 권위가 하늘 높이 솟았나보다.
천리길(?)을 달려왔건만 문턱이 이리 높아서야 원. 눈을 감아야만 문고리 찾을 수 있으니 원. 문안에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 힘들게 하나? 원래 문턱은 집의 문기둥의 좌우를 붙잡아 주는 것이거늘 발길을 맴맴하게 붙드나? 문을 여닫거나 잠글 때 쓰는 문고리이건만 어찌 장님 술래잡기놀이를 하게하나?
문턱과 문고리에 관련한 속담이 의미롭다 싶다. “문턱 높은 집에 무종아리 긴 며느리 생긴다”. “문턱이 낮은 글이 좋은 글이고 문턱이 낮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장님 문고리 잡았다” 등 곱씹지 않아도 알아채는 말로서 어린시절 문턱을 밟으며 드나들 때 꽤나 집안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난다.
누가 설계했을까? 누가 감리 했을까? 어린시절 미로 탐험놀이를 즐겼나보다. 백성을 섬기는 분들이 근무하는 건물들이다. 섬기는 것은 두 손으로 받치는 것이며, 지배하는 모습은 내려보는 것이다. 가슴과 눈높이와도 상관하는 일로 케케묵은 벽장속(후한서 양홍전)의 그 옛날 거안제미(擧案齊眉)고사를 인용해보자. “반상을 들오대 눈썹에 마초이다” 견강부회이나 섬김의 깊은 의미를 담고있지 않은가? 단오절에 <그네>를 타는 것도 아닌 바에야 눈높이도 아닌 발아래 미로찾기놀이로 게걸음을 해서야 원.
허면 고층빌딩의 섬김의 자세란? 게걸음의 멎음인 앞걸음이어야 하겠다. 이를 위해 낮은 문턱과 쉽게 잡을 수 있는 자석 문고리(?)는 어떠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