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정기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하늘연못, 천지에 가보셨어요?
돈키: 난 못 갔지만 주변 분들이 사진을 많이 보내오지. 민족의 영산이라 마음만으로도 높이가 2,744미터, 깊이가 384미터쯤은 되나싶어.
언젠가는 가겠지.
호새: 하늘과 땅(天地), 하늘 연못(天池), 하늘 근원(天元), 하늘의 명(天命)… 말 자체가 큰 기운을 담고 있어요.
돈키: 그렇지. 하늘과 땅 사이에 한반도가 있고, 그 상징이 바로 백두산이지.
호새: 1990년엔 조훈현 9단과 유창혁 4단이 한복을 입고 천지에서 기성전 이벤트 대국도 하더군요.
돈키: 흑백의 세계가 하늘 아래 놓인 셈이지. 바둑판 중앙을 천원(天元)이라 부르는 것도 그 까닭이야. 옛 기원에서는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대마불사(大馬不死)” 같은 말도 많이 들었는데, 알파고 이후엔 또 달라졌어.
호새: 요즘엔 대마보다 대호(大虎)가 더 귀하죠. 구석에라도 자기 모습은 펼쳐 살아야 하니까요.
돈키: 맞아. 백두산 호랑이는 사라졌지만 그 기백은 남아 있어. 내도 맹호부대 출신이야.
어느 분은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를 두고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 차리면 산다”는 뜻이라며 웃으셨지.
호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모습 지키며 사는 게 말처럼 쉽나요?
교실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나 하는 말이지요.
돈키: 바둑이 수싸움 같아도 결국은 사람이 어울리는 일이야. 살타(殺他)가 아니라 이타(利他), 서로 살리고 베풀어야 상생이 되는 법이지. 씨름도 기술만이 아니라 어울림이 명승부를 만드는 거야.
호새: 천하, 백두, 금강, 태백, 한라… 말만 들어도 기운이 나요.
돈키: 손·발·허리에 힘을 모아 ‘으라차차’ 하는 씨름판에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지. 세상도 같아. 결국 샅바를 어디에,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지.
호새: 우리는 시대의 샅바를 제대로 잡은 걸까요?
돈키: 글쎄, 그건 스스로 물어봐야지.
호새: 타짜들은 왜 사무실에 백두산·큰 바다 같은 풍경화를 걸어놓을까요?
돈키: 심상 속에 펼치고 싶은 세계가 있기 때문이야. 물 한 모금도 누가 마시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듯, 인성이 그만큼 중요해.
조각가가 비너스를 만들든 분묘석을 다듬든 심상이 다르잖아.
호새: 그럼 주인님 심상은요?
돈키: 몇 번을 말하냐. Now & Here.
지금 여기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뿐이야.
백두산도 휴화산인데, 고조선 이래 흥망을 지켜보며 가끔 트림하듯 연기를 내뿜는다고 하잖니.
호새: 그럼 날개라도 돋워 날까요?
돈키: 천지의 품이 크니 상상력이 날개를 달지. 좌로 이천리, 우로 천여 리 흐르는 기운을 봐봐.
호새: 장자에 나오는 대붕 같네요. 구만리 창공을 가르는 3천리 날갯짓…
돈키: 중요한 건 상상력이지. 마음이 먼저 나네.
호새: 그럼 간도, 연해주로도 날아가볼까요?
돈키: 때가 오면 가야지.
산정에 오르면 하늘에 살짝 닿는 마음이 생기거든.
호새: 천지를 보니 눈이 시원하고 가슴이 터여요. 남이 장군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白頭山石磨刀盡 / 豆滿江水飮馬無 / 男兒二十未平國 / 後世受稱大丈夫.”
돈키: 젊은이의 기백이야.
“백두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한 발 두 발 걸어서 올라라”.
“가나다라마바사아…, 으해으해, 으허허… ”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아도 이내 노래는 짧다고 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