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와 구슬치기
어렸을 적 집 뒤꼍으로 가려면 수돗가를 지나서 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반대편 좁은 골목을 지나 가는 방법도 있었다. 수돗가를 지나 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넓었으나 가끔 왼쪽의 좁은 길로 가기도 하였는데 , 이는 건넌방의 뒷문에 신발을 갖다놓으면 거리가 짧아 바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곳에 여기저기 구멍이 패였다. 구멍이 패였다고 지나갈 수 없는 길이 된건 아니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골목의 구멍은 오빠가 혼자 구슬치기를 할 수 있는 전용 공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다양한 놀이감도 없던 시대였고 눈이 휙휙 돌아갈만큼 빠른 인터넷은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기에 구슬치기는 남자 아이들의 최고의 놀이감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전용 게임장이 집안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또 동그랗고 투명한 구슬은 얼마나 이쁘고 탐이 나는지...
동네의 아이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두 깡통에 자신의 구슬을 보물단지처럼 끼고 살았다. 오빠 또한 깡통에 구슬을 보관하고 동네 아이들과 집앞 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뒤꼍으로 가는 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혼자 하곤 했는데 이는 동네에 동갑내기가 없었고 게다가 내성적인 성격에 형이나 동생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남아선호 사상이 짙었던 그 시대에 우리 집에서 유일한 아들이었던 오빠는 위로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엄마. 아버지 등 모든 가족의 축복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유치원을 보내면 너무 되바라져서 안된다던 엄마는, 딸들은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유치원을 오빠는 당신이 손목을 이끌고 입학을 시켰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의 소풍은 동네의 저수지를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유일하게 국민학교 6학년은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었다. 서울로 출발하는 기차역이 집결지였는데 할머니가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그 시절, 아무리 기다려도 할머니가 오시지 않아 가족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저녁 늦게서야 오빠와 함께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이유인즉 서울까지 가는데 유일했던 손자가 너무 걱정되어 그 자리에서 같이 기차를 타고 창경원에 다녀오신 거였다.
이러한 상황이니 당시 오빠의 구슬치기 골목은 우리 자매들에겐 마치 성지나 다름없었다. 오빠가 뭐라 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그 길을 지나가면 안될 것 같고 구슬치기 구멍이 메워지거나 훼손되면 큰일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오빠가 재작년 환갑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100세 시대에 반을 조금 넘기고 그나마 생의 절반을 병상에서 보내다 굴러가는 생의 구슬을 잡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이렇듯 떠난 오빠에겐 몇 개의 구슬이 있었을까?
동그란 구슬마다 오빠의 인생 이야기가 꾹꾹 담겨져 있을 텐데...
한 개의 구슬은 태어날 때 이야기, 한 개의 구슬은 학교 다닐 때 이야기. 또 한 개의 구슬은 결혼 할 때의 이야기 등등... 그 이야기를 다 풀어내려면 구슬의 개수는 수도없이 많아야 할텐데 투명한 구슬 하나하나가 옛날 이야기들을 모두 보여줄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혼자만의 구슬치기를 즐겨서 그런가,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여 구슬의 개수를 늘리지 못해서일까 ? 구슬의 개수가 별다른 변화가 없어서인지 놀이를 통해 구슬을 많이 땄으면 오빠의 삶도 더 이어지지는 않았을는지 공연히 구슬을 많이 못땄던 그 시절이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꼭 구슬 때문에 오빠가 그리된건 아니지만 어쩐지 구슬의 개수가 오빠의 인생인 것처럼 공연히 쓸쓸한 마음에 핑계삼아 탓해본다.
이제는 곁에 없는 오빠지만, 그토록 만지작 거리던 구슬도 다 사리지고 없지만, 혹 새로운 투명한 구슬에 지금 잘 있노라고 잘 도착하였다고 보여준다면 깊숙이 내리박힌 돌덩이 같은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까?... 시리도록 쓸쓸한 마음이 잔잔한 미소로 답할 수 있을까?...
애꿎은 구슬 타령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쓸쓸하다 못해 시베리아 같이 추운 마음을 굴려본다.
쓸쓸함 데구르르...
추운 맘 데구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