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바람소리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서늘한 바람소리로
아침과 저녁을 맞는다.
참 오래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서늘함이다.
철이 들어서일까?
초교 시절,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성적표를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더위를 식히는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성적표에는
수, 수, 수보다 어려운 집안살림이 적혀 있었다.
집에 보탬이 되려
서너 마리 양을 끌고 집에 들어서면
아버지의 두툼한 손길이
뺨에 선연했다.
여름날에 만난 서늘함이었다.
찰나의 기억 하나가
한낮의 들판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떠오른다.
그때 나는
물리적인 세계와 의식의 경계가
어딘가에서 맞닿는 순간을 경험했는지도 모르겠다.
들판을 마주하고
서늘한 바람소리를 듣는다.
어린 날의 촉감은 저편으로 물러가고
오늘의 서늘함은
삶의 무게를 깨우는 회초리가 된다.
가을이면 으레 찾아오는 바람인데
늘어가는 나이테 때문일까.
저만치,
아니 그 옛날 한참 앞서 걸어간
발자국의 주인공들도
이런 바람을 맞았을까?
품으로 달려드는 오롯한 서늘함이
한낮에 늘어진 기운을 깨운다.
산야를 훑는 눈길에도
서늘함이 스민다.
숱하게 내뱉은 거친 입말들이
서늘한 바람소리에
허리가 잘린다.
말보다 침묵이 먼저 서는 가을.
아직 신경은 살아 있다.
통증에도 신음소리 하나 없이
높푸른 빈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이 가을에 서약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