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3 (목)

화성에서 띄우는 편지 555

숫자의 마력―천변기행49


숫자의 마력―천변기행49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오랜만에 둑방길을 달린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달리기건만
어느새 예전의 기록과 견주며
헐떡이는 순간까지 내달린다.

 

아마도 숫자가 지닌 마력 때문일 게다.

 

몇 분에 얼마를 달렸는지,
지난번보다 빨라졌는지 느려졌는지,
숫자가 어느새 건강을 위한 달리기를
기록과의 싸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문득 피타고라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떠오른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마저 숫자로 설명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숫자만큼 오래 붙들고 사는 인연도 드물다.

 

평생 떼려야 뗄 수 없는 생년월일에서부터
하루의 시간을 나누는 시·분·초까지.
배움터에 들어서면
시험점수와 등수라는 숫자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 숫자가 목표가 되어
앞을 향해 달리기도 한다.

 

경기에 나서면 기록이 숫자로 남는다.
월드컵축구 처럼
한 골, 한 점의 숫자가
선수와 관중을 넘어
온 국민의 마음을 들뜨게도,
때로는 가라앉게도 한다.

 

요즘은 주식시장의 숫자가 매스컴을 달군다.
오르내리는 수치에 마음을 졸이는 개미들의 모습이
요즘 산책길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와도 닮았다.

 

숫자의 마력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수백만 년이라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태고의 시간에도 숫자가 있고,
0과 1이라는 단순한 숫자 안에는
오늘의 디지털 세상과
우주를 탐구하는 질서까지 담겨 있다.
어쩌면 숫자는
우주가 우리에게 건네는
또 하나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고정된 숫자와 흘러가는 숫자,
유한한 숫자와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
우리는 그 숫자를 들고, 지고, 메고
때로는 숫자를 좇으며 한세상을 살아간다.

 

나이도 숫자요,
돈도 숫자요,
시간도 숫자요,
기록도 숫자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숫자로 잴 수 없는 것도 참 많다.

 

그리움은 몇 점이고,
우정은 몇 미터이며,
노을의 아름다움은 몇 초란 말인가?

 

삶의 깊이와
사람의 마음까지
숫자로 잴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시도 때도 없이 놀던 어린 시절이
어쩌면 선계(仙界)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을 재지 않았고,
순위를 세지 않았으며,
누구보다 앞서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놀고, 웃고, 뛰었다.

 

숫자를 모르던 것이 아니라
숫자에 매이지 않았던 시절.

 

오늘도 둑방길을 달리며
기록을 재고 있는 나에게
어린 시절의 내가 조용히 묻는다.

 

“몇 분에 달렸느냐보다
오늘 얼마나 행복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숫자의 세상 한가운데서
잠시 숫자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천변의 물결은
아무런 숫자도 세지 않은 채
말없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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