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7 (수)

화성에서 띄우는 편지 512

선인장 – 천변기행 33


선인장 – 천변기행 33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천변길을 걷다 아파트 단지 끝자락 작은 풀밭에서 선인장 한 포기를 만났다. 메마른 흙과 뜨거운 햇살을 견디며 제 꽃을 피워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척박한 환경일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생명력 때문일까.

 

선인장의 꽃말에는 정열, 인내, 비밀스러운 사랑 같은 말들이 따라붙는다. 문득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또한 저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서 있으나, 저마다 가슴속에 눈물겨운 꽃 한 송이쯤 품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길게 이어진 자투리밭에는 고추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다.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줄에 몸을 의지한 채 햇살을 받아들이며 붉은 결실을 준비한다. 작은 몸집으로도 강한 맛을 내는 고추를 바라보니 “작은 고추가 맵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세상 또한 그렇다. 크고 화려한 것보다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는 작은 존재들이 세상을 지탱하는 경우가 더 많다.

 

미니공원을 지나니 모내기를 마친 논이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다. 얼마 전까지 황갈색이던 들판이 어느새 생명의 색으로 바뀌었다. 물가 수풀에는 여뀌풀이 무성하다. 어린 시절, 풀을 지쳐서 우린 물로 물고기를 잡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사람은 그 곁을 지나며 추억을 더해 간다.

 

길섶에는 고들빼기가 노란 머리꽃을 다북하게 피우고 있다. 쌉싸래한 맛으로 밥상에 오르던 나물이다. 입안에 남는 그 씁쓸함처럼 인생 또한 달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나 그 쓴맛이 있기에 밥맛이 살아나듯, 삶도 고단함 속에서 깊이를 얻는 것인지 모른다.

 

오전 내내 감자밭의 잡초를 뽑았다. 뜨거운 햇살 아래 허리를 굽히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갈라진 흙 사이로 땅속 감자알을 상상하니 수고로움마저 즐거움이 된다.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늘의 손길이 내일의 결실로 이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바퀴 들판을 돌아보며 생각한다. 가지런한 논과 밭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름 없는 농부들의 손길과 발걸음이 켜켜이 쌓여 이루어진 풍경이다.
세상에는 말이 많다. 저마다 옳음을 주장하고 큰소리를 낸다. 그러나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말보다 손과 발이다. 땀과 실천이 없는 말은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와 다르지 않다.

 

선인장의 꽃말 가운데 ‘비밀스러운 사랑’이 있다. 생각해 보면 사랑이란 꼭 청춘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말하지 못한 채 가슴에 품고 사는 그리움도 사랑이고, 묵묵히 가족을 위해 흙을 일구는 마음도 사랑이다.

 

때로는 두마당 장대높이뛰기처럼 현실의 벽을 훌쩍 뛰어넘는 용기가 사랑이 되기도 한다.
그런 사랑들이 세상 곳곳에 숨어 있기에, 오늘도 들판은 푸르고 사람 사는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포토뉴스

더보기

섹션별 BEST

더보기